숀 쉬한 지음·조준상 옮김 필맥 발행·1만2,000원
아나키즘은 흘러간 옛노래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흘러간 옛 노래인가. 숀 쉬한이 쓴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은 그렇지 않음을, 제목처럼 아나키즘이 '우리 시대에 대한 설명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늘상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셉 푸르동, 미하일 바쿠닌, 피터 크로포트킨의 이름을 떠올린다. 다들 200년 전부터 100년 전까지 살았던 사람들이다. 국내의 아나키스트들 또한 마찬가지다. 신채호, '의열단'의 사람들, 박열 등도 거의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아나키즘은 '혁명을 장미빛 낭만으로 기억하는 좋았던 옛 시절의 무용담' 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사이 국내외에서 아나키즘의 현대적 재해석이 시도되면서 이런 편견은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특히 아나키즘 철학이론, 정치사상 등 이론적 측면보다는, 생활양식과 문화 현상에 주목하는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이 수용자들에게 쉽게 다가서고 있다. 정보사회, 문화의 디지털화, 세계화로 인한 사회의 다문화주의적 분화에 힘입어 패션처럼 번지고 있다.
아나키즘, 라이프스타일로 부활하다
전통 아나키즘은 전투적이고 혁명적 차원에서 연합주의, 집산주의(아나르코―상디칼리즘), 공동체 공산주의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 권위, 위계, 사회질서, 소유양식, 종교가 주된 관심사였다. 이른바 하드웨어적 담론이 주류였다. 반대로 현대 아나키즘은 문화, 환경, 생활양식에 주목하는 소프트웨어적 차원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현대 아나키즘의 시각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바라본다.
1999년 시애틀의 WTO회의 당시 벌어진 반세계화 시위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바쿠닌처럼 전투적이지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즉흥적이지도 않다. 시애틀에 모인 아나키스트들은 돈키호테처럼 자신을 희화화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의 주변을 허무는 우회적 방식을 취한다. 시애틀 항의 시위에 나타난 21세기의 새로운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을 향해 돌을 던지고 피 터지게 싸우기보다는, 운동의 중심을 '세계체제 밖'의 반(反)위계적이고 다양한 감수성으로 충만한 세상을 향하게 함으로써 중심을 무효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전체 6장 중 2∼4장은 아나키즘의 철학사상과 정치 이론을 다룬다. 그러나 이 역시 과거의 이론가들을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중심으로 오늘까지 이어지는 이론적 계보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68혁명'의 아나키즘 정신이 70·80·90년대에 각각 어떤 모습으로 재등장하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5, 6장은 아나키즘 예술과 미학이 영화 문학 음악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그들의 문화 전복(顚覆) 형식을 나열한다.
아나키스트의 딜레마
저자가 생각하는 아나키스트는 필자가 보기에 '사회주의자' 로버트 노직이다. 노직은 자신의 '소유권리론'에 충실하여 국가를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털끝만큼도 손상하지 않기를 원하는 '진정한 자유지상주의자'이기 때문에 동시에 사회주의자일 수는 없다. 여기에 아나키스트의 딜레마가 있다. 인간을 사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사회적 개인'으로 보는 인간관을 가진 사람이 사회주의자로 사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롤스적 의미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라는 좁은 사잇길을 교묘히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의 입지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아나키즘을 논하는 책을 보면 국가 아닌 공동체, 정당이 아닌 가치공동체, 자유가 아닌 자율, 국유화 대신에 자주관리 등의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바로 위와 같은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와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역사적 한계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영원한 '존재론적 갈등'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저자의 말은 빠르고, 글은 경쾌하다.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마구 토해 낸다는 점에서 현란함도 갖추었다. 이런 요소는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너무 멀리 나가면 그는 다다이스트가 되고 만다. 아나키스트로 살기 위해 경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여차하면 그는 원시주의, 신비주의, 극단적 개인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휴머니즘, 본성으로서의 인간의 사회성,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의 가능성,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긍정하고 신뢰한다면 그는 건강한 아나키스트일 것이다.
/구승회(동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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