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의 야외 상영장인 수영만에서 객석 뒤편의 벤치에 앉아 개막작 ‘도플갱어’를 보고 있는데 곧잘 중년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며 불평하는 것이 들렸다. “역시, 영화는 한국 영화가 제일 재밌다 아이가….” 피식 웃음이 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도플갱어’는 현대 일본 영화계의 대표적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이다. 실패작을 만들지 않는 드문 감독 기요시의 영화답게 잘 만든 영화다.이상하게도, ‘도플갱어’는 느닷없이 현실에 자신의 분신이 등장해 함께 살아간다는 다분히 공포영화적인 소재를 취하고 있으나 수영만 야외 극장에 운집한 5,000 여명의 관객을 제압하기에는 힘이 달려보였다. 공포, 스릴러, 코미디를 오가는 이 짜임새 있는 영화는 큰 소리를 지르기 보다는 소곤거리는 영화의 유형에 가깝다.
소극장용 영화라고 할까. 대형 화면으로 불특정 다수의 관객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현대 일본 영화가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대신 얻어낸 대가가 이것이다. 비주류의 감성으로 일상의 특이한 면모를 포착하는 자그마한 규모의 예술인 것이다.
‘도플갱어’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내 안의 다른 자아가 현실에 튀어 나와 내가 억누르고 있는 것들을 대신 시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저절로 생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다 지친 소심한 과학자 하야사키는 어느 날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자신의 분신, 도플갱어 때문에 황당한 일을 겪지만 머지 않아 그 분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사회 순응형 인간인 그에 반해 그의 분신은 뭐든지 원하는 것은 거칠 것 없이 실행에 옮기는 야만인의 욕망에 충실하다.
‘도플갱어’는 우리 안의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며 우리 바깥의 세계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 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걸 강요하지 않고 차분히 묘사하고 있다. 과연 이 영화가 한국 영화보다 재미가 떨어지는지는 모르겠으나 차분히 실내 극장에서 감상해볼 만한 가작이다.
‘버스데이 걸’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야심찬 행보를 보이는 니컬 키드먼의 구작(?)이다. 키드먼의 2001년 출연작인 이 영화는 여하튼 니컬 키드먼을 보는 매력이 뭔지 유감없이 증명해보인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러시아 여자로 키드먼이 나오는 이 영화는 ‘러시아에서 사랑을’이라는 문구가 적힌 웹사이트에 접속했다가 러시아 여자를 알게 돼 일상이 엉망진창 되는 영국 남자의 연애담이다.
니컬 키드먼이라는 스타의 매력은 그녀가 아무리 촌스런 러시아 여자로 분하고 나와도 여전히 니컬 키드먼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건 기대했던 만큼 이 영화가 만듦새가 썩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라는 얘기도 된다. 니컬 키드먼 때문에 곤경을 겪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기꺼이 시험에 들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홍콩 영화 ‘쌍웅’ 제목대로 두 남자 영웅이 변화무쌍한 활약을 벌이는 액션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추측해 보건대, ‘무간도’ 이후 홍콩 영화는 특수효과에 대한 강박증을 떨쳐내려는 모양이다. ‘쌍웅’은 의리와 사랑을 장황하게 묘사하는 감상주의를 화면에 품고 정교한 액션의 수사학으로 관객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홍콩 영화의 부활한 재주를 엿보게 한다. 그게 그네들이 원래 가장 잘 했던 것이 아닌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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