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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실패"라는 자기충족적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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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실패"라는 자기충족적 예언

입력
2003.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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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은행의 예금보장 능력에 대한 회의감이 퍼지면서 예금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예금을 인출했고, 그 결과 부실 은행뿐 아니라 건실한 은행까지도 도산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른바 '자기충족적 예언'의 정리(定理)를 제시했다. 사람들이 특정 상황이나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심각하게 믿을 경우, 그러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행동에 가담하게 되고, 그에 따라 개개인의 인식과 행동의 연쇄작용이 증폭돼, 예측했던 일이 실제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노무현 정부 출범 8개월째인 지금, '노무현의 실패'라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암암리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노 대통령측은 '노무현 때리기'가 일부 보수 언론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부당하게 자행되고 있다고 치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치권은 논외로 하더라도, 각계 원로 및 지도급 인사, 학자, 지식인 등 사회 여론주도층 상당 부분이 이미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더욱이 이것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말할 것도 없이 노 대통령에게 있다. 현 정부는 출범 이후 교육행정 정보시스템 시행에 반대하는 전교조의 투쟁, 철도노조 파업, 화물연대 파업 등 압력단체의 집단행동에 원칙 없는 대응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새만금 간척사업,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문제와 같은 대형 국책사업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답답하기는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원장 임명과 행자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둘러싼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대립, 그리고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이후 청와대와 거대야당의 책임 떠넘기기에서 볼 수 있듯이,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는 갈등과 불신 그 자체다. 노 대통령은 내년 총선에서 야당이 제1당이 될 경우 총리직을 맡기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책임총리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기초로 국정운영을 하겠다고 한다. 미국식 대통령제에는 총리가 없다. 노 대통령의 진심이 무엇인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책임총리제의 조기 이행을 촉구하며 노 대통령을 압박하고 나섰고, 한나라당은 이를 즐기고 은근히 부추기는 분위기다. 이래저래 권력구조를 둘러싼 정치권의 또 하나의 비생산적 싸움이 이어질 전망이다. 이 같은 국정표류 속에 민생과 경제는 멍들고 불황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리더십 부재'라 일컬어지는 현 상황은 노 대통령 자신이 타개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은 통합신당 창당이 완료되는 대로 입당해 당적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초당적 리더십'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또 하나의 '실패한 대통령'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실패의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말보다 실천이다. 국민은 당당하고 패기 넘치는 리더십을 원한다. 산적한 국가의 난제들을 풀기 위해 발로 뛰어 다니고 대화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코드'에 집착하지 말고, 초조하게 국면전환을 꾀하지 말고 사력을 다해 정도를 걷다 보면 멀어진 민심도 결굴 돌아올 것이다. '노무현의 성공'이라는 '자기충족적 예언'을 기대해본다.

이 충 묵 한국학술연구원 부원장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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