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니 준이치(小谷純一) 선생이 1975년 한차례 유기농 강연을 한 뒤 전국에서 선생을 다시 만나 볼 수 없느냐는 성화가 들끓었다. 그래서 6개월만에 고다니 선생의 두번째 방한을 추진하게 됐다. 두번째 초청에도 고다니 선생은 흔쾌히 받아줬고 이듬해인 1976년 1월 방한, 마찬가지로 부천 풀무원농장에서 또다시 강연회를 가졌다.부천 농장에서의 두번째 강연에는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처음 강연은 큰 준비도 없었을 뿐 아니라 고다니 선생을 아는 이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 식구들과 근처의 지인들 몇몇만 모여서 들었다. 그러나 부천에서의 첫 강연 직후 고다니 선생을 이끌고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었던 터라 두번째 방문강연에는 전국에서 숱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 무려 40∼50명이 강연장에 빼곡히 들어찬 가운데 고다니 선생의 강연은 성황리에 진행됐다.
강연이 끝나고도 참석자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리곤 누구랄 것 없이 "우리도 일본의 애농회와 같은 유기농 단체를 만들자"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즉석에서 유기농 단체 '정농회(正農會)'가 설립됐고 회장으로는 오재길씨가 뽑혔다.
회칙 같은 것은 뒤에 만들어졌고 그 자리에서는 정농회라는 모임의 명칭과 강령이 나왔다. 강령은 일본 애농회의 그것을 원용, 5가지로 정했다. 간략히 정리하면 '바른 농사에 정진한다. 정농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정농정신으로 모든 노고를 달게 받는다. 청소년 정농교육을 위해 모범이 된다. 사랑과 협동의 이상농촌 건설에 매진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강령에는 유기농이라 표현이 한 군데도 없지만 '정농'이라는 것 자체가 유기농의 의미를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
회장은 당연히 내가 선출돼야 한다고 다들 우겼지만 나는 "전도자로서 공동체를 이끄는 데만 전념하겠다"며 극구 사양하고 양주에서 농장을 하며 교회운동에도 적극적이던 오재길씨를 추천했다. 그래서 오씨가 초대 회장을 맡고 나는 부회장을 맡게됐다. 오씨는 그 뒤 정농회를 10여년간 이끌면서 열성적으로 일해 모임을 키웠다. 나는 그 뒤에도 부회장이나 고문으로 물러나 있었다.
처음에는 정농회의 성격에 대해 다소 논란도 있었다. 당시 농촌사회에는 카톨릭농민회나 기독농민회 등 농민의 권리찾기 운동 단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도 유기농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참여적인 활동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권리찾기나 데모는 그 쪽에 맡겨두고 우리는 생명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 데모를 하려면 그쪽 단체에 가입하라"고 큰 소리로 나무라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농민회 쪽에서 '정말 잘 한 일'이라며 도리어 감사의 말을 건네고 있다.
정농회는 그 뒤 매년 1월 총회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고 유기농법에 대한 각종 정보도 나누고 있다. 지금은 전국에 7개 지회를 두고 있으며 600여명 회원들이 유기농법으로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해 내고있다. 여름에는 하계연수회도 열어 각 지회별 활동보고를 듣고 현장경험을 나누고 있다. 90년 들어서는 경실련과 손을 잡고 '경실련정농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정농회원들이 생산한 무공해 농작물을 전국의 일반회원들에게 공급도 하고있다.
정농회는 유기농운동의 선구자인 고다니 선생의 도움으로 이렇게 출범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자리잡았다. 개인적으로는 유기농을 접하고 정농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좀 더 큰 규모로 바른 농사를 지어보자는 희망을 키워갔다. 경기 양주의 풀무원공동체가 그 결과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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