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탄강이 크게 범람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것이 파괴됐죠. 물이 어느 정도 빠졌을 무렵, 정신없는 도시 사람 하나가 투망질을 하다가 수재민에게 거의 맞아 죽을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흉사가 있는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분명 예의가 아닙니다.우리나라의 단풍은 북쪽에서 시작되지만 동쪽에서 출발하기도 합니다. 단풍 고운 산들이 동해안과 붙어있는 백두대간에 몰려 있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산불과 이어서 '광복 이후 최대'의 수해를 연거푸 경험한 곳입니다. 불행을 당한 지역에 단풍 놀이를 가는 것. 이것이 비례(非禮)일까요? 아니, 완전히 반대입니다.
동해안 지역의 경제는 상당부분 관광에 의지합니다. 단풍을 보러 가는 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닙니다. 가서 먹고 즐기는 것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직접 수해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절로 생길 테니까요.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지난 해에는 강원도지사와 동해안 지역의 시장 및 군수들이 직접 나서서 단풍을 보러 오라고 광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찬바람이 불면서 수재민들의 시름은 점점 깊어집니다. 다가올 겨울이 걱정입니다. 제안을 하나 할까요. 빈 손으로 가지 말고 뭔가를 들고 갑시다. 차 트렁크를 가득 채웁니다. 장 속에 묵히고 있는 겨울 옷, 라면 등 생필품, 두툼한 이불이나 가재도구 등등. 무엇이든 좋습니다. 수해지역의 지자체나 자원봉사단체들은 단풍산 입구의 주차장이나 도로의 휴게소에 구호품을 받을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 따스한 마음을 받습니다. 돌아올 때엔 트렁크를 다른 것으로 채웁니다. 감자, 옥수수 등 강원도 토종 농산물과 오징어 등 동해안의 맛을 담아 옵니다.
대청봉에 서서 햇살을 받은 단풍 능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올해의 단풍은 예년에 비해 색깔이 곱습니다. 단풍잎처럼 많은 사람이 찾기를 은근히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이 색깔 그대로 저 산 아래까지 번지기를. 지난 해 뜨겁게 경험했던 붉은 악마처럼 말입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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