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항로는 한 순간 우연히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먼 훗날 그 우연은 필연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의 관계 같은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고 개척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곧 기회가 되는 것이다.신라호텔에 근무할 때인 1986년 어느 가을 날. 나는 갑작스럽게 그룹 비서실장으로부터 면담호출을 받고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가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GC)에서 근무하게 될 것 같다. 곧 이병철 회장님의 면접이 있을 것이다."
순간 아찔했다. 이병철 회장님이 일주일에 3일 이상 찾을 정도로 아끼는 안양 CC는 삼성 그룹 내에서 근무가 가장 어렵고도 까다로운 곳으로 정평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 책임자는 6개월 이상 근무하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내겐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었다. 당연히 직장 생활에 목매야 할 상황 이었다. 그런데 언제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는 그곳 부지배인으로 가라고 하니, 밤새 잠 한숨 못자고 고민 할 수밖에….
그때까지 나는 골프장 부킹이나 골프행사 뒷바라지는 몇 번 해보았지만 골프채 한번 잡아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잔디나 나무를 가꿔 본적도 없었다. 그런 처지에 회장님 앞에 서니, 온몸이 두려움으로 떨려왔다. 차라리 불합격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회장님은 3분여 동안 아무 말씀 없이 내 표정만 살피시더니 "자네 농사일 해 보았나?"라고 물었다. 난 잘됐다 싶어 솔직히 말씀 드렸다. "한번도 해본적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자 회장님은 "그래도 한 가지는 있을 게 아닌가" 라고 되물으며 나를 1분여 정도 뚫어지게 바라 보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렇지만 합격이었다. 부임통지를 받고 마음은 무거웠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근무지를 한번은 보여 줘야 할 것 같아 함께 안양CC로 향했다. 골프장 가는 길에 아이들은 "경치 좋다"고 즐거워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천근 만근 가라앉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아내가 물었다. "언제쯤 집에 올 수 있으세요?" 난 "3개월쯤 못 갈 거야"라며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그때의 나를 바라보는 걱정스런 아내의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애초 나는 2년만 무사히 근무를 마치고 그룹 내 다른 회사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안양CC에서 무려 5년을 근무했고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은 이스트밸리CC를 경영하고 있다. 다행히 내가 몸 담았던 골프장들은 모두가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위기는 기회였고, 또 내 인생의 필연처럼 느껴진다. 이따금씩 '골프장 경영은 나의 천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조 한 창 이스트밸리CC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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