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점점 더 이라크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미 국방부 공식 집계에 의하면 지난 3월20일 이라크 전쟁 발발 후 5일까지 이라크에서 숨진 미군은 모두 317명에 이른다. 이 중 절반이 훨씬 넘는 179명이 5월1일 전투기 조종사 복장을 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선상에서 의기양양하게 승전 선언을 한 이후 사망했다. 한층 대담해지고 자살공격도 마다하지 않는 저항의 양상으로 보아 앞으로 미군 피해는 쉽게 줄지 않을 것 같다. 이라크인들이 사담 후세인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미군을 쌍수로 환영할 것이라는 미국측의 당초 기대가 산산조각이 난 지는 오래다.미국 내에서는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에 기초해 전쟁을 밀어붙인 부시 대통령과 그의 충실한 네오콘 참모들이 심각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던 부시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쯤 되면 일찍이 이라크전 강행의 부당성과 무모함을 지적했던 사람들은 내심 고소해 할 만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조기에 이라크가 안정되지 않을 경우 이는 미국만이 아니라 중동지역 나아가 전세계의 재앙이 될 개연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라크는 쿠르드족 문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종파 내부의 정교분리주의와 호메이니식 신정주의 대립 등 종족적으로, 종교적으로 긴장이 매우 첨예하다. 그 동안 사담 후세인의 무자비한 철권 통치 하에서 눌려 있었던 이러한 갈등이 후세인 체제 붕괴 후 걷잡을 수 없이 분출하고 있다. 단선적 사고를 하는 미국의 네오콘들은 대책도 없이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젖혀 버린 것이다.
이라크의 혼란과 비극은 이라크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쿠르드족 문제로는 터키가, 종교 문제로는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고 쿠웨이트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등 인접 이슬람 국가들도 결코 이라크 정정과 무관할 수 없다. 대미 성전을 부르짖는 이슬람 세계의 과격 전사들은 이라크로 속속 모여들어 게릴라전에 가세하고 있다. 이런 혼란 속에 증폭된 테러의 에너지가 미국은 물론 동남아 유럽 등 전세계로 분출해 나갈 때 그 공포와 충격은 극에 달할 것이다.
미국의 잘못된 선택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이라크 혼란을 수습하는 것은 이제 전세계가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이라크 파병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눈앞에 놓고 있는 우리의 출발점도 바로 여기다. 미국이 명분 없이 저지른 전쟁이니 우리가 끼여들 필요가 없다며 외면하는 것은 안이하다. 전세계가 이라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하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마지 못해 끌려갈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미국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 전후처리의 주도권을 놓칠 것을 우려해서 아직까지 유엔 등 국제사회에 권한을 이양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대신 자신들이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한국과 터키 파키스탄 등 동맹국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 이라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들도 내부 반대여론 때문에 유엔의 깃발이라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파병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미국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라크 수렁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계 성 국제부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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