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길 옆
주막(酒幕)
그
수 없이 많은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 만치
위엄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에 닿은 그런 사발엔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엔.
시인 김용호는 시 '주막에서'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주막의 풍경을 그렇게 노래했다. 그 시인도 벌써 오래 전 주막의 운명처럼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경기 하남시 천현동의 마방(馬房)집은 주막의 정취를 자아내는 토속음식점이다. 아니 이 땅의 마지막 주막이었다고 해도 틀림 없을 듯 싶다. 마방집은 하남시청 앞에서 지하차도를 지나 광주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80년 넘는 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여전히 그렇게 서 있다. 주막은 예전엔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길손의 쉼터였다. 마방집에서 숙박의 기능이 멈춘지는 오래다. 대신 구수하고 맛깔스러운 된장찌개가 곁들여진 한정식이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마방집의 어른 원연희(元蓮姬)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일흔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에게 살림을 물려받아 반세기 넘도록 장을 담그고 손님상을 차리던 원 할머니였다. 그 텅 빈 자리를 이승종(李昇鍾·46) 열종(烈鍾·44) 두종(斗鍾·39), 삼형제가 메우고 있다. 3대째 대물림이 이뤄진 것이다.
"직업선택의 문제로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두 형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죠. 무엇보다 가업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부담이 정말 컸거든요. 10여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형제들이 모여 가업을 잇기로 결정했고 지난해 어머님의 별세로 그런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됐습니다." 원 할머니의 막내아들 두종씨의 설명이다. 대물림의 과정에서 둘째 열종씨의 일본체험은 형제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하기야 일본에는 100년 전통을 지닌 음식점들이 흔하다. 창업 600년을 훨씬 넘긴 만두전문업체까지 있다.
"제가 형님들 보다 먼저 결혼을 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은 마방집의 대를 잇는 게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4대째 대물림은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 원 할머니가 떠난 주방은 주방어머니로 불리는 최윤희씨가 지킨다. 주방식구들도 20년 가까이 마방집에서 일하고 있다. 모든 일을 믿고 맡기던 원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를 이어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것도 마방집의 특징이다. 이 집에서 '효자 할아버지가족'이라고 부르는 단골손님이 있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정겨워 그런 별명을 붙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잊을 수 없는 손님이다. 김 전 대통령은 '마방집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직접 써주기까지 했다.
2000년 경기도에 의해 '대물림 향토음식점'으로 지정된 마방집의 맛은 장에서 우러나온다. 집 뒤꼍 장독대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은 크고 작은 항아리가 200여 개 가득하다. 11월이면 메주가 처마 밑을 따라 주렁주렁 달린다. 그 모습이 장관이란다. 하기야 해마다 30가마 분량의 콩으로 메주를 쑤니 그럴 만도 하다. 원 할머니는 생전에 장독대 곁의 소나무에 신주항아리 2개를 매달아 놓고 장 담그기 전에 치성을 올렸다. 그 정성이 그대로 음식에 배어 있는 것이다.
된장찌개는 최소한 2년 이상 묵힌 된장을 알맞게 풀어 푹 끓인다. 여기에 두부 버섯 쇠고기 몇 점에 고추 마늘 파 등 갖은 양념을 보탠다. 된장찌개 한정식은 8,000원이다. 스무 가지가 넘는 나물반찬이 딸려 나온다.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불씨로 석쇠에 구어내는 소·돼지장작불고기 등은 따로 주문한다. 가마솥에 장작을 때 지어낸 밥맛도 그만이다. 밥 가마솥이 두 개인데 한 솥에서 150인분이 나온다.
말 이외에는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하남시 천현동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당연히 주막이 들어섰다. 장호원 이천 여주 광주 등에서 서울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은 마방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천호동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도둑이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밤길은 가급적 피해야 했다.
원할머니의 시부모가 마방집을 인수한 때는 1920년께.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광복 전까지 마방집 앞에는 우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1960, 70년대 근대화의 물결은 우마차꾼을 밀어내고 화물차 운전기사를 마방집의 주요 고객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방집의 변화는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날씨가 추어지면 아버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방마다 군불을 지피셨습니다. 아버님을 도와 소형화로에 불씨를 담아 트럭 운전석으로 나르곤 했죠. 엔진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두종씨의 유년시절에 우마차는 이미 교통수단의 지위를 상실했다. 숙박업의 중단은 하남이 시로 승격된 80년대 초였다. 서울로 들어가는 43번 국도가 새로 뚫렸고 자동차도 흔해졌다. 더구나 전국민의 발을 묶어놓았던 통금의 폐지는 저절로 숙박의 기능을 앗아갔다. 새 국도의 개통이 미친 영향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방집 본채의 일부가 도로부지에 포함돼 헐렸다. 그 바람에 700여평에 달하던 마방집의 부지도 500여평으로 줄어들었다.
"지금 남아 있는 마방집도 도로부지로 잡혀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헐려서 옮겨 지어야 할 겁니다." 두종씨의 말은 담담했다. 그러면서도 원형을 보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 어감에 묻어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미식가 사로잡는 주막밥상 원형보존
하남시의 마방집은 주막(酒幕)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한정식 역시 주막밥상이 발전한 것이다. 주막은 원래 간판이 없다. 하지만 이름은 있다. 대개는 길손들이 그 집의 특징을 살려 이름을 지어 불렀다. 울안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어디매 오동나무집', 이런 식이었다. 하남의 마방집도 마구간이 딸려 있던 주막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우마차꾼은 물론이고 과거 보러 남쪽에서 말을 타고 올라오던 선비들도 묵어가곤 했다. 그 무렵 마구간을 갖춘 주막이나, 마소와 당나귀를 두고 삯짐을 실어 나르던 영업을 하던 곳은 모두 마방집으로 통했다. 마방집의 순 우리말은 마바릿집이다. 보다 큰 보편성을 획득한 한자어 마방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주막은 객주(客主)나 여각(旅閣)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객주와 여각이 경제사정이 넉넉한 상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데 반해 주막은 보통사람이나 소상인들이 즐겨 찾았다. 이른바 사람냄새가 가득한 곳이 주막이었다. 민속연구자들은 주막의 효시를 신라시대 경주의 기생 천관(天官)의 술집에서 찾기도 한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金庾信)이 화랑시절 천관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주막은 17세기 후반 이후 사상(私商)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번창한다. 대처에는 객주, 포구에는 여각이 발달했고 시골에선 주막이 여숙의 영업을 했다. 장이 열리거나 역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주막이 들어섰다. 주막은 숙박보다 음식점의 기능이 우위에 있었다. 숙박비는 보통 음식값에 포함됐다. 음식을 시켜 먹으면 숙박비를 별도로 받지 않은 것이다. 주막에는 길손을 위한 온돌방이 마련돼 있었다. 잠자리에 필요한 침구는 없었다. 방바닥에는 단지 거적이나 자리가 깔렸는데 그런 방을 봉놋방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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