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을 빨리 치러 가자며 그의 용기를 의심하는 신하들에게 김유신은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역사는 강한 자의 기록이며, 더불어 이름을 가진 자의 그것이다. 김유신 계백 의자왕처럼 말이다. 그러나 감히 '황산벌'은 역사가 이름도 없이 그저 '거시기'라고 불리는 자들의 것이라고, 역사가 호명해야 할 이들은 바로 수많은 무지렁이 '거시기'들이라고 말한다.
'황산벌'(감독 이준익)은 보수적 시각에서 보면 꽤 불온한 정치적 상상력을 감추고 있으되, 기발한 코미디로 가득찬 한 손을 관객들에게 들어 보임으로써 '정치적 콤플렉스'에 빠지는 것을 피했다. 도발적이고 영악하다.
서기 660년. 영토 확장을 꾀하는 신라가 당나라와 나당연합군을 결성한 가운데 백제,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신라의 조공길을 막자 당나라는 군사를 동원, 서해 덕물도에 진을 친다. 당나라 병사가 먹을 쌀을 배달하러 나선 신라의 김유신은 길이 막히자 백제를 치기 위해 남하한다.
간략한 정황 소개가 끝나면 영화는 전장으로 들어간다. 의자왕은 계백을 불러 술 석 잔을 권한 후 "니가 거시기 해야겄다"고 말하고, 계백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식의 목을 베어 죽인 후 황산벌로 나간다. 계백의 5,000 결사대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의 음력 7월9, 10일 이틀간의 대치가 영화의 줄거리다.
사투리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치 중의 하나다. 첩자가 염탐해온 계백 장군의 전술 지시('우리는 거시기할 때까진 거시기해야 한다')를 해독하는 장면이나 '보성 벌교 애들'을 데려와 욕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박장대소가 터지게 한다. 이 장면은 상업적으로 매우 유효한 호객술인 동시에 갈등이란 소통 부재에서 비롯하며 동시에 표준어로 씌어진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허섭스레기 사투리라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한다.
두 장군이 장기를 두는 대로 앞마당의 병사들이 말이 되어 죽거나 죽이는 '인간 장기' 대결은 전쟁이란 영웅의 탁상공론에 따라 민초들이 죽어가는 '역사의 임상 실험'이란 사실도 일깨운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의 시니컬한 태도와 심리적으로 위축된 장군을 능멸하는 부관 등 영화는 철저히 영웅 위주의 전쟁 영화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웃음의 원천을 삼는다.
10년 전 어린이 영화 '키드캅'을 제외하고는 연출 경력이 전무한 이준익 감독은 노련한 역사관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전례 없는 사극 영화 한편을 매끄럽게 빚어냈다. 코미디 영화 수준의 제작비(34억원)로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은 알뜰한 프로덕션의 미덕이다. 17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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