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없는 공립박물관'이 난립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국고 지원을 받아 건립하는 공립박물관 가운데 상당수가 전시 문화재와 유물을 확보하지 않은 채 고증이 어려운 모형물과 영상자료, 사진만으로 꾸미고 있어 '속 빈 박물관'이라는 지적과 함께 예산낭비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내년 초 개관하는 백제역사민속박물관을 비롯해 현재 건립중인 일부 공립박물관의 경우 지자체가 건물부터 짓고 보자는 식으로 추진하고 있어 새로운 애물단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이 건립비의 30∼50%를 지원해 짓고 있는 공립박물관은 7월 현재 40여 곳. 정부 보조금만 총 400억원이 넘는다. 이 중 총 공사비 276억원의 절반씩을 문화재청과 충남도가 부담하는 백제역사민속박물관은 정부의 무분별한 지원정책에 따른 대표적 중복투자사업으로 꼽힌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평 2,600여 평에 이르는 이 박물관의 건립 목적은 백제의 역사, 문화,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해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실제 준비상태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최근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은 "박물관측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나 문화재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며 "인근에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이 있는데도 새 박물관을 짓는 것은 전형적 예산낭비"라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은 이 박물관이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일반 박물관과 달리 백제문화재현단지를 안내하고 생활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성격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현실성과 타당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제대로 된 유물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고증 근거와 자료가 불분명한 백제인의 생활상을 모형물과 영상으로 복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우려가 무성하다.
백제사를 전공한 한 교수는 "일반 백성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지배층의 경우에도 관복의 색깔 외에 형태나 방식에 대해서조차 알려진 게 없다"며 "상상과 추정으로 재현하는 자료는 왜곡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전국 각지의 다른 박물관도 구체적 전시 유물 준비 계획은 없고, 영상과 그래픽을 활용하거나, 조악하고 형식적인 사료만을 모아두려는 경우도 허다하다. 75억원을 들여 짓고 있는 논산 '백제 군사박물관'은 백제 군사에 관한 국내외 자료 전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고증이 사실상 불가능한 영상물과 복제 유물로 채울 예정이다.
현재 운영 중인 46개 공립박물관을 대상으로 한 올해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감사원에 따르면 공립박물관의 74%가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고, 광주 빛고을국악전시관, 고창 판소리박물관, 익산 보석박물관,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마산시립박물관 등 5곳은 학예사, 수장고, 작업실, 항온·항습시설을 갖추지 못해 박물관 등록도 못하고 있다.
이처럼 박물관이 난립하는 것은 정부가 현재 340여 개의 국·공·사립박물관을 2011년까지 500개로 늘리는 데 급급, 박물관 건립계획과 유물보유 여부를 실사하지 않고 있는 데다 지자체로서는 손쉽게 국고보조금을 따낼 수단이기 때문이다. 최종호 한국박물관학회 사무국장은 "현재 정부의 박물관 정책은 살아있는 박물관이 아니라, 박제화한 박물관만을 양산하고 있다"며 "건립비 지원기준을 강화하고 건립 후 콘텐츠 관리에도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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