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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눈이 나빠도 해외동포인데도 굳이 軍입대한 세명의 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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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눈이 나빠도 해외동포인데도 굳이 軍입대한 세명의 젊은이

입력
2003.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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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사단 공병 오성주오성주 상병은 제주도가 고향이다. 고향에서 한라대 중국어과 1년을 마쳤다. 2001년 신체검사에서 군에 갈 수 없는 4급 판정을 받았다. 마이너스시력 때문. 그는 모 CF에서처럼 힘차게, 그러나 제멋대로 시력표를 읽고는 "가고 싶습니다"를 외치지 않았다. 곧바로 라식수술을 받아 양쪽 시력을 1.0으로 높인 것. 당연히 재신검을 통과하고 지난해 4월20일로 입대일이 명기된 영장을 받아 쥐었다.

30사단 헌병 김범석

김범석 상병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집이 있다. 컨설팅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먼저 현지에 정착한 뒤 1985년에 전가족이 이민을 떠났다.(그가 겨우 네살 때다) 대학진학을 위해 귀국, 한국외국어대 마인어과 2년을 마쳤다. 그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온 가족이 해외에 영주권을 갖고 거주하는 경우여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않는 병역면제 대상자다. 입대일은 지난해 6월4일.

12사단 통신병 유종찬

유종찬 상병 역시 96년 가족이민을 떠나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한 해외동포 1.5세. 그 곳에서 뒤늦게 고교를 마치고 명문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 진학, 기계공학과

2년을 마친 뒤 지난해 군 입대를 위해 홀로 귀국했다. 가족은 모두 캐나다 국적을 취득했으나 그 혼자만 시민권 신청을 포기, 영주권자로 남아있다. 앞서 김 상병과 같은 케이스의 병역면제 대상자. 지난해 9월2일 훈련소에 입소했다.

지난 주 '국군의 날'을 앞두고 국방부 영내에서 세 젊은이를 만났다. 육군 12사단 통신병 유종찬(劉宗瓚·25), 30사단 헌병 김범석(22), 17사단 공병 오성주(吳成珠·21). 셋 다 군대생활의 절반을 넘긴 '중고참' 상병들이다. 경험에 비추어볼진대 군 생활에 어느 정도 이골이 나 슬슬 요령도 생기고 걸음걸이도 슬몃 팔자(八字)로 벌어지기 시작할 딱 그즈음. 그러나 이들은 훈련소를 갓나온 신병처럼 바짝 군기가 들었다. 상관들의 시선을 가려주려 뜰 한켠 그늘로 자리를 옮겼어도 빳빳이 풀 먹인 듯한 자세는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법적으로(심지어 도의적으로도)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군 복무를 선택한 청년들이다. 유, 김 상병은 해외동포이며, 오 상병은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자 수술을 받으면서까지 끝내 입대를 한 젊은이다. 다들 어떡해서든 병역을 피하고 보자는 풍토 속에서, 정당하게 주어진 '혜택'(어폐가 있지만 맥락상 적당한 대안을 못 찾겠다)을 서슴없이 포기한 청년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지 자못 궁금했다. 인터뷰는 칼날 같은 경례와 "상병 ○○○!"하는 우렁찬 고함으로 시작됐다.

아마도 이들에 대한 반응은 둘로 갈릴 것이다. 대견해 하거나, 아니면 "얘들, 바보 아냐?"하고 비웃어 버리는(요즘 풍토로 볼진대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지않아도 동기부터 물었다.

(오) "주위로부터 '군 생활을 통해 배운 게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듣고, 군 생활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뭔가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세대답지 않게 숫기가 적은 이들의 짤막한 대답에는 부연이 필요하다. 요컨대 살아가는데 필요한, 특히 딱 그 시기가 아니면 체득할 수 없는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김) "제대하고 학교 졸업한 뒤에는 한국과 말레이시아를 연결하는 사업을 할 계획입니다. 군에 갔다 오지 않으면 특히 한국에서는 원하는 생활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역시 해석을 붙이자면 어디에서든, 어떤 경우든 조금이라도 꿀리고 싶지 않다는 것)

(유) "저는 언제부턴가 소방관 직업에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 고국에서 소방관들이 순직한 뉴스를 보고는(2001년 3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다가구주택 화재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희생됐던 그 사건이다) 소방관을 하려면 한국에서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를 위해 당당한 경력을 갖추고 싶었습니다."

혹 실망스러울지 모르겠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혹은 "내 나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따위의 근사한 '모범답안'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생각해보라. 공허한 명분보다 그 또래다운 '실용적'인 동기에 더 신뢰가 가지 않는지. 말하자면 군 복무를 해야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다들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 상병을 제외하고는(그는 오히려 격려를 받았다) 집안의 반대를 꺾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대저 인식이란 경험에 갇히기 마련. 아버지 세대의 옛 군 경험이란 게 대개는 열악한 시설과 장비, 가혹한 훈련, 질 낮은 식사, 비인간적인 처우, 상존하는 위험… 뭐 그런 것들일 터이다. 지금이야 즐거운 추억담이겠지만(원래 불합리하고 엉터리 같은 경험이 더 얘기거리가 되는 법이다) 금쪽 같은 자식에게 차마 그걸 또 겪게 하고 싶을 리 없다. 유 상병의 경우는 더 심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을 전해 듣자마자 당장 미국에서의 사업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밴쿠버로 날아왔다. "소방관도 위험해 말릴 참인데 한국에서 군 복무까지 하겠다고?" 하지만 어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아버지는 한달 만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 그래서 막상 군에 입대해보니 어떻습디까. 은근히 후회 되지는 않던가요? (사실 요즘도 자주 받는 질문이란다)

(오) "오히려 기대 이상입니다. 소극적이고 말도 잘 못했는데 다양한 배경과 성격의 동료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면서 성격까지 바뀌었습니다. 군은 또 다른 대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처음엔 욕들을 많이 해 놀랐습니다. 한국남자들이 굉장히 거칠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배를 배려한다는 게 "야, 새끼야. 와서 이거 먹어" 식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그게 좋게 느껴집니다. 내면엔 따뜻한 정이 있다는 걸 아니까요."

(유) "개인주의적 사회에 익숙해 있던 저로선 집단생활부터 잘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같이 먹고, 같이 외출하고… 무엇보다 훈련 뒤 막걸리 한사발씩 나누며 서로 격려해줄 때의 일체감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군에서 좌우명까지 얻었다고 했다. "'견의용위(見義勇爲)'입니다. 책에서 본 건데(원래는 논어 위정·爲政 편에 있다) 정의를 보면 용감하게 행한다는 뜻이지요."

요즘 군대생활에 대해 물었다. "후배한테도 사적인 일은 못 시키고 욕도 한마디 할 수도 없다는데 그래 갖고 제대로 돌아갑니까? 막말로 '까라면 까야'하는 게 군대인데…."

"하루가 다르게 군 문화가 바뀌고 있습니다. 과도기지요. 더구나 요사이 그런 지시가 하도 많이 내려와서 다소 혼란스러운 면도 없진 않습니다. 선임병들은 '쫄병 때 죽도록 고생했더니 하필 내가 고참이 되서 이러느냐'고 불평을 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계급에 따른 책임감은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특히 나중에 유 상병은 온갖 궂은 일에 앞장서는 행정보급대 모 상사 얘기를 하면서 꼭 지면에 소개해달라고 당부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라면서)

공병인 오 상병은 특이하게 목공일을 담당한다. "장가 갈 때 웬만한 가구는 다 만들어갈 수 있겠네"라고 했더니 "좋은 목재만 있다면요"라고 선뜻 말을 받았다. 헌병인 김 상병은 정문에서 위병을 서거나 부대 밖 교통통제를 나갈 때 따뜻한 관심이 고맙다고 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차에서 내려 사탕을 손에 쥐어주고, 꼬마들은 '충성'하고 고사리 손으로 경례를 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눈물이 핑 돌만큼 스스로가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유 상병은 밤마다 소방 공무원 시험준비를 한다. 주로 연등실(군대에서 10시 취침시각을 한시간 넘겨 불 켜는 걸 '연등'이라고 하는 데 여기서 파생된 말인 듯. 아무튼 군대엔 알쏭달쏭한 용어가 많다)에서 공부한다.

입대를 싸우며 말리던 아버지들은 지금은 아들 자랑에 침이 마른단다. 누구보다 힘들게 입대한 유 상병의 경우는 아버지가 교민사회에서 '대단한 아들'을 둔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귀국해서 영어강사를 하는 친구가 있는 데 저한테 원망이 많아요. '너 때문에 나도 집에서 군대 가라는 성화를 듣는다"고요."

지난 봄 청년장교들을 만났을 때도 그랬거니와 군인들과의 '공식' 대화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끌어내기는 확실히 쉽지 않다. 대답은 시종 짤막한 단문으로만 이뤄졌다. 이들 또한 제대하면 묻지도 않는 '군대얘기'를 시도때도 없이(눈치없이 여자친구 앞에서조차도) 평생 화수분처럼 뽑아낼 텐데도.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그래도 군 생활임에랴. 그러나 여전히 이들 세 젊은이들이 말 그대로 자신들의 선택을 회의하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아느냐고? 인터뷰 때보다도 "곧바로 귀대해야 한다"며 다시 경례를 붙이고 돌아설 때의 표정이 훨씬 밝았으므로.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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