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서울로 올라온 뒤 내가 줄곧 다닌 교회는 통상 '동신교회'로 불렸지만 정식 명칭은 '기독동신회 중앙교회'다. 목사나 장로 등의 교직제도가 없고 평신도들이 교회의 직제(職制)를 담당하는 수평적인 형태의 교회로 모두가 형제라는 뜻에서 '형제단(브레드린·brethren) 교회'로도 불린다. 지금도 전국에 20여개 교회가 산재해 있고 중앙교회는 제기동으로 옮겼다.특별한 사상적 지향이 없던 내가 동신교회를 선택한 것은 청년시절 나에게도 권위를 부정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던 듯하다. 한때 교리를 둘러싸고 선교사들과 충돌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도 이 같은 성향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롭게 살다간 '씨알 사상가' 함석헌(咸錫憲·89년 작고)선생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닌가 싶다.
나보다 10살 정도 위인 함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였다. 무교회운동을 벌이던 선생의 주장에 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YMCA에서 있었던 선생의 목요강좌에도 자주 들렀다. 선생은 나중에 무교회주의도 버리고 보다 더 자유로운 '퀘이커교도'를 선택했다. 나는 공동체를 출범시킨 뒤 땅에서 바른 생활을 일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갈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 선생과 나는 농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선생은 1957년 천안에 '씨알 농장'을 세우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그런 선생은 농사이야기를 하기위해 내가 운영하던 공동체를 찾아 부천과 양주를 자주 들렀고 나도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이 현대사에 끼친 사상·실천적 영향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농사에 관해서는 선생은 나보다 한참 아래였던 것 같다. 농사는 도리어 나한테 배워여 할 형편이었다.
여름이 한창이던 8월초 정도로 기억된다.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갔는데 선생은 포도밭에서 알이 영 부실한 포도를 들고는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선생님?"하고 내가 다가가자 선생은 "포도가 하나같이 알이 차질 않네"라고 말을 받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포도송이가 나올 무렵 곁에 있는 포도순을 따줘야 하는데 시기를 놓쳐 포도가 제대로 영글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올해 농사는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며 농 섞인 말을 던지자 선생의 얼굴이 굳어지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한번은 늦가을에 천안농장을 찾은 적이 있는데 마침 호박죽을 끓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농장에는 항상 선생을 따르는 후학들이 있었는데 그날도 농장에서 생활하는 대학생 3명이 함께 였다. 선생은 밥상머리에서 "나는 원고료를 받으면 겨울날 걱정이야 없겠지만 너희들은 어떻게 겨울을 날 거냐"며 다소 걱정 섞인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한해 농사를 지어 겨울날 걱정을 할 정도였으니 농사 실력은 알만했다.
함 선생은 나에게 사소한 문제나 고민도 많이 털어놓았다. 한번은 선생이 미국을 갈 일이 있어 공항에 배웅을 나갔는데 젊은이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선생이 교회운동과 관련해 노선을 달리할 때라 일시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줄어든 것인데 선생은 나에게 "원형, 나의 죄와 국가의 죄를 모두 지고 비행기에서 태평양으로 떨어져 죽었으며 좋겠네"라고 고뇌에 찬 말을 던졌다.
선생은 농사와 자유로운 신앙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나와 통하는 면이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농사를 통해 바른 일꾼을 길러내겠다는 나의 의지를 여러모로 다져준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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