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시장이 단순히 중고물품을 싸게 파는 곳에서 즐거운 놀이공간으로 인식되면서 서울시내에도 크고작은 벼룩시장들이 많이 생겨났다. 특히 서초구청이 주관하는 토요벼룩시장과 문화기획가 김영등씨가 꾸려가고있는 홍대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은 각기 뚜렷한 개성을 연출하면서 서울시를 대표하는 벼룩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두 곳을 현장 취재했다.서초 벼룩시장- 만물상속에서 보물찾기
토요일 오전 11시 서초구 보건소 앞 광장. 서초구가 주최하는 토요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초구 보건소 앞 광장과 인근 이면도로에는 1,000여개가 넘는 노점들이 벌써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흥정에 한창이다.
만물상이라는 말 그대로 어느 집 부엌에서 수십년은 족히 보냈을 듯 싶은 부엌칼부터 녹슨 공구, 현이 두어 개 밖에 없는 고장난 바이올린, 코흘리개들이 물고 다녀 귓부리가 하얗게 닳은 곰인형, 가죽코트에 찌그러진 구두와 운동화, 옷가지, 1927년도에 출판됐다고 써 붙인 삼국지, 시계 알만 있거나 밴드만 있는 손목시계 등등이 늘어선 좌판마다 널렸다.
종류도 많지만 가격은 더욱 제각각이다. 명품브랜드라는 손가방은 1만원, 니트 상의는 1,000원, 주판은 3,000원, 은비녀 3만원, 가죽구두 2,000원. 부르는 게 값이고 사이즈만 맞으면 거저도 준다는 호객행위도 애교스럽다. 7명 손주들이 줄줄이 물려 입던 옷을 팔러 나왔다는 할머니는 500원짜리 조끼를 팔면서 좀이 슬어 구멍이 난 면 티셔츠를 덤으로 준다. 워낙 물건이 많다 보니 사는 사람도 느긋하게 구경을 앞세우지만 파는 사람도 재활용품들이니 아쉬울 것이 없다.
가끔은 횡재도 한다. 골동품 수집이 취미인 박대규(48·인테리어업·수원시 고동동)씨는 안팎으로 섬세하게 옻칠이 된 칠보 보석함 두개를 4만원에 샀다며 싱글벙글이다. "만든지 20년은 넘은 것이라 시중 골동품상에서 구입하면 족히 40만원은 줘야하는 물건"이라고. 한달이면 두서너 차례씩 벼룩시장을 찾는 박씨는 벼룩시장의 재미는 바로 이런 '뜻밖의 보물을 낚는 기쁨' 이라고 말한다.
토요벼룩시장에는 마니아들도 많다. 12번째 시험관아기 시술을 통해 얻은 다섯 살 짜리 외동아들과 함께 나온 조명연(42·서울 용산구 후암동)씨는 1년째 토요일이면 이곳을 찾는다. 이날도 아들이 선택한 레고블록과 벽걸이 장식품, 옷가지 등을 사다 보니 양손엔 까만 물건봉지가 잔뜩 들렸다. "서초동이 잘 사는 동네여서 그런지 물건도 좋은 게꽤 많이 나온다"는 그는 "장사치 같지 않고 후덕해보이거나 옷을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나 할머니 좌판에 가면 어김없이 유명브랜드의 좋은 물건이 많다"고 귀띔한다.
물품 재활용을 통해 건전 소비문화를 정착시키다는 취지에 맞게 토요벼룩시장에 내놓는 물건은 중고품이어야한다는 것이 의무조건이지만 간혹 새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보건소 옆으로 난 이면도로를 쭉 올라가다 만난 한 매대에는 모피코트가 여러 장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가격을 물어보니 블랙그라마 모피 반코트가 150만원이란다. 구청직원에게 걸리면 안된다며 속삭이듯 "이건 완전 새 것"이라고 귀띔한 상인은 오늘 두개 갖고 나왔는데 벌써 한 개는 현찰 받고 팔았다며 돈주머니를 툭툭 친다.
토요벼룩시장은 주민등록증만 지참하고 당일 아침 나오면 누구나 판을 벌일 수 있다. 오전 8시30분에 자리를 배정받고 장사를 시작, 오후 3시에 문을 닫는데 일반인들이 벌이는 판이다 보니 오후 2시만 돼도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이 꽤 된다.
홍대앞 프리마켓- 예술 애호가들의 꿈만들기
토요일 오후 3시 홍익대 정문 맞은편에 있는 놀이터는 온갖 진귀한 예술품을 팔거나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진귀하다고 해서 엄청나게 비싼 예술품을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곳에서 팔리는 예술품들은 정확히 말하면 예술가 지망생들의 습작품이다.
오후 1시부터 문을 열어 오후 6시에 판을 접는 홍대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은 중고품을 판매하는 일반 벼룩시장과는 달리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갖고 일반인들과 만나는 자리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는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이 때문. 참가를 원하는 작가들은 미리 프리마켓 사무국에 작가등록을 하고 참가신청서를 내야 하는데 워낙 신청자가 많다보니 통상 1,000명을 넘는 신청자중에 120명 정도에게만 자리가 돌아간다.
물건들은 사지않더라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그림을 그려 염색한 티셔츠, 유리를 정교하게 깎아만든 촛대, 알록달록 온갖 형상을 담은 구슬공예품, 디자인부터 손바느질까지 직접 한 가방과 회화작품들, 인형과 도자기 등 특이한 것들이 많다. 작품이다 보니 가격도 만만치 않다. 10만원짜리 가방부터 20만원을 호가하는 촛대, 7만원을 부르는 강아지 옷, 4,000원 하는 휴대폰 액세서리 등이 많고 에누리도 없는 편이다. 디자인 값이 붙기 때문이다.
'호순이'라는 명함을 건넨 인형작가 성은경(22·서울 마포구 대현동)씨는 "여기 나온 사람들은 돈을 벌겠다는 것보다 작가로서의 역량을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받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다. 꿈을 키우는 공간인 셈이다"라고 말한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가격 흥정보다는 디자인에 더 관심이 많은 표정이다. 연극연출을 공부하고있다는 김명자(36·서울 구로구 독산동)씨는 "특별히 뭘 사겠다는 생각보다는 작품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훔쳐보는 재미가 만만치않다"고 말한다. 프리마켓이 알려지면서 장이 서는 토요일 참관인구는 대략 1만명쯤으로 추정되지만 이중 상당수는 쇼핑보다는 흥미로운 공연을 보듯 판을 즐긴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서로의 예술적인 기호를 드러내는 데 서슴지않는 장터, 그래서 프리마켓은 더 자유분방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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