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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76>시인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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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76>시인 김기택

입력
2003.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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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이던 어느날 회사에서 외출했다가 들어오니 책상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메모를 보는 순간, 신춘문예에 응모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전에 한 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 본선에서 거론조차 된 적이 없었고, 신춘문예 사고를 보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투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터라 뜻밖이었다. 어쨌든 별 희망 없이 지루하게 살고 있던 나에게는 큰 용기가 되었고, 한때의 취미로 머물다가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았던 나의 시 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나는 시 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원으로 생활하고 있을 무렵, 안양에서 동인지 활동을 하는 친구, 선후배들과 어울려 습작을 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의 습작이란 직설적으로 과격하게 마음을 토해내는 배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의 맛은 없었지만 후련하기는 했다. 그 나이 그 환경에서는 매우 유익한 공부였고 약이었을 것이다.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탄 기억이 있다. 주어진 제목이 '토끼'였는데, 토끼에 대해 쓸 만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추운 겨울에 친구들과 하교 길에 얼어 죽은 토끼를 발견하고 배가 고파 주워서 구워 먹었던 이야기를 썼다. 상 탄 것은 좋았는데,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글을 낭독하라는 것이었다. 전교생 중에는 함께 죽은 토끼를 구워 먹은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그 친구들이 들으면 어떡하나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끝까지 낭독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낭독을 거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일로 글 쓰는 일을 꺼리게 된 것 같다.

내 등단작은 '꼽추'와 '가뭄'이다. 정적이고 어두운 시들이다. 안에서는 무언가 터지려고 하는데 그것을 싸고 있는 육체와 삶은 불구이고 억압적이고 폐쇄적이다. '꼽추' 앞부분에는 불구에다 노인에다 거지인 사람이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한 인간으로서는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 다소 과장되게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폐쇄된 어둠 속에서 노인이 일생을 억눌러온 등뼈를 부수고 보기 흉한 불구의 등을 터뜨리고 나오는 상상을 한다.

이 등단작을 보며 습작기를 돌이켜 보면, 내 시는 자신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습작기의 나는 육체적으로 매우 열등하고, 환경도 보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앞날은 캄캄했고,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기댈 곳이 없었고, 그것을 헤쳐가기에 너무 무능하였고,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었으며, 몇몇 사소한 약점이나 버릇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치욕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것을 견디기 위해 상상 속에서 나 자신을 더욱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곤 하였다. 내 나약한 성격에게 어떠한 상황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내 몸이 견뎌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극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시가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시는 직접적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고도 어떤 극한 상황에도 처하게 할 수 있었고, 스스로 부과한 폭력과 수치를 남을 엿보듯 즐기면서 견디게 해 주었을 것이다. 시는 이러한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등단 초기에는 이상하게 동물시가 많이 씌어졌다. 왜 그 시기에 동물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시들 속에 나오는 몇몇 동물들은 환경의 폭력을 견디느라 몸의 특정 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해 있거나 한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기능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폭력을 견딘 상처가 육체화된 것이며, 그 폭력과 역사는 아직도 육체 속에 살아 남아 그 육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구경거리이거나 음식일 뿐이다.

동물시는 아마도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내 시를 다시 읽어보면 외부와 환경의 폭력을 견뎌낸 몸들, 거기서 생긴 상처와 두려움이 육체화된 현장을 관찰할 때, 나 자신이 매우 공격적이 되고 집요해진다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구경거리나 음식물이 되는 동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를 관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시집의 첫 작품은 '쥐'다. 쥐만큼이나 어둡고 칙칙한 시다. '호랑이'란 시도 있고 '거북이'란 시도 있는데, 하필이면 '쥐'가 첫 시집 첫 작품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선택하도록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이 내 시세계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운명적으로 규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쥐는 스스로 제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밝은 곳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고 자꾸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한다. 나도 지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으려고 한다. 평균적인 삶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가정 속으로, 너무나 흔한 외모여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직장인의 모습 속으로 숨는다. 가능하면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삶의 압력에 눌려 나는 쥐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몽둥이가 있는 대낮의 한가운데를 어쩔 수 없이 통과하고 있다. 나는 자꾸 쪼그라들고 작아진다. 내가 쓴 '쥐' 안으로 점점 갇히고 있다.

내 시에 불구나 미물이나 하찮은 것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이미 내 몸 속에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시는 정확하게 내 몸이 생긴 대로만 나온다. 꼴값하느라 그러는 건데 어찌하겠는가. 내 생긴 것과 다른 것을 쓰면 당장 표시가 난다. 안 들킬래야 안 들킬 재주가 없는 것이다.

등단 15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여전히 한 회사의 건물 속에, 한 가정의 가장 속에, 수많은 평범한 40대 남자들 속에 숨어 있다. 숨어서 안 쓰는 척하며 최소한의 작품만 쓰고 있다. 일정 기간에 쓴 작품들이 모이면 시집을 낸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이런 행위는 무엇인가? 이런 시 쓰기를 계속 해야 하는가? 혹시 시인이라는 외부적 프리미엄을 누리기 위한 습관적인 행위는 아닐까?

하기야 내 나약한 성격에 습관은 미덕이다. 고정 관념과 편견과 고집과 항상 다니던 길만 골라 가는 버릇으로 이루어진 이 습관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내 성격에 확실하게 갈 길을 제시한다. 이 힘으로 나는 세 권의 시집으로 묶은 작품들까지 쓴 것인가?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이것도 이미 내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들과도 싸워야 한다.

어쨌든 이 습관적 행위로 나는 아슬아슬하게 나를 견디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선조와 내 몸 안에 쌓이고 고착되고 끊임없이 강화된, 약하면서도 고집불통인, 이 육체화된 상처, 육체화된 폭력을 가지고 나는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식욕이며, 성욕이며, 결코 멈추는 법이 없는 여러 욕망들의 요구에 끊임없이 응하고 그것들 때문에 한 시도 바람 잘 날 없는 마음에 아부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일방적으로 그런 요구를 들어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 그러므로 그 욕심 사납고 고약한 일상생활과 부딪치며 수치를 감수하며 내 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왜 시를 쓰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시 쓰는 일은 나를 견디는 일이라고. 한 방이면 박살나는 머리로 꿈꾸고 한 칼이면 순대나 쓰레기가 되는 심장으로 분노하는 나를 견디는 일이라고. 이미 나 자신이 되고 내 인격이 되고, 내 생명이 되어버린 '육체화된 상처'와 '육체화된 폭력'을 견디는 일이라고. 대대로 물려받은 식욕과 성욕과 불안의 유산으로 매일매일 먹고 사는 일을 견디는 일이라고.

● 연보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198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 '가뭄' 당선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등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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