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10월2일 독일의 군인 겸 정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폴란드 포즈난에서 태어났다. 1934년 몰(沒). 힌덴부르크는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 샤를 드골과 함께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군인 정치인이었고, 군인 정치인답게 완고한 우익이었다. 19세기 독일 제국 창건의 주축이었던 융커(프로이센의 귀족) 출신인 그는 자기 계급 사람들이 흔히 그랬듯 제국의 장교로 입신했다.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지 않았다면, 힌덴부르크라는 이름은 독일 밖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 세 해 전인 1911년, 64세의 힌덴부르크는 독일 제국 제4군단장 자리를 물러나며 군문에서 은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그를 역사로 불러냈다. 개전 직후 대장 계급과 함께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힌덴부르크는 참모장 루덴도르프 소장과 함께 동프로이센 남부의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파해 초기 전황을 독일에 크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군 9만 명을 포로로 잡은 타넨베르크 전투는 기원 전 3세기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남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을 대파한 칸나이 전투와 함께 군사학에서 포위섬멸전의 대표적 예로 거론된다.
힌덴부르크는 군신(軍神)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참모총장에까지 올랐고, 전시 독일을 사실상의 군부 독재로 이끌었다. 독일이 패전한 뒤 다시 은퇴한 그는 1925년 4월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 되었고 1932년 재선되었다. 그 이듬해 1월30일 힌덴부르크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예비역 하사 출신의 원내 제1당 지도자 히틀러를 연립 내각의 총리로 임명했다. 나치가 이미 장악하고 있던 공업·농업 이익집단들과 귀족·대자본가의 압력에 굴복해서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아마 자신도 원하지 않았을 제3제국의 문을 열어 젖혔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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