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생활 틈틈이 나는 전국을 무대로 전도와 설교에도 힘을 쏟았다. 공동체 식구들을 상대로 한 전도와 출장강연을 통한 전도가 내 신앙생활의 두 축이었던 셈이다. 전도를 위한 강연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여수 애향원에서 나환자들과 만난 일이다.당시만 해도 나환자는 기피의 대상으로 철저히 격리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상의 공간에 드러난 나환자들은 일반인들로부터 괄시를 받기 일쑤였다. 여수 애향원으로 강연을 내려가는 길에서도 나는 이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의 두어 자리 건너편좌석에 나환자로 보이는 승객이 앉아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승객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저리비켜"라며 쫓아내 버렸다. 그 나환자는 아무말 없이 짐을 챙겨서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병이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환자들과 함께 자고 먹는 것도 꺼리지 않아 '성자'니 하는 오해섞인 찬사를 받기도 했다.
여수의 애향원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나환자들의 집단거주지로 치료활동도 겸하고 있었다. 애향원의 초청으로 나환자들과 애향원 운영자들을 상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도할 기회를 가진 나는 애향원 입장에서는 듣기 곤혹스런 이야기도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 직후 대부분 보호시설들이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보조금이 적었기 때문에 갖은 편법을 동원해 지원금을 빼 먹으려 했는데 가장 일반적인 수법이 인원 부풀리기였다. 가령 70명을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210명이라고 신고해 3배의 지원금을 타내는 방법이다. 애향원이 직접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나환자들의 집단시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강연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제발 악마의 행동의 그만두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당장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운영을 못한다"는 지적이 뒤따랐지만 나는 "운영이 안되면 빌어먹더라도 뿔뿔이 흩어져라, 그러면 정부에서 무슨 방책을 낼 것이다"고 강변했다.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나의 충고에 많은 이들이 수긍하고 실제 운영방식을 바꾼 곳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애향원을 내려갈 때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밥도 먹고 함께 자기도 했지만 나환자들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번은 강연을 위해 애향원으로 내려가 마당에서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반대편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선 쪽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눈치챈 나환자가 손님에게 혹시 냄새나 병균이 닿을까 걱정돼 비껴섰다는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손님을 배려한 조심스런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해 애향원에서 1주일간 지내고 돌아온 뒤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농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농장입구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와서 나가봤더니 나환자로 보이는 전도사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애향원과 같은 재단인 한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도 지방에서 마찬가지로 나환자 교회를 이끌고 있다는 전도사였다. "왜 들어오지 않고 여기 서있느냐"고 묻자 이 전도사는 "환자된 몸으로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라고 나직하게 반문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끌고 농장으로 들어가 그가 찾아온 경위를 차근차근 들어줬다. 그는 "환자를 부풀려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일까요"라며 내가 애향원에서 강연했던 내용과 똑 같은 고민을 털어 놨다. 나는 "당장 먹을 게 없어 흩어지더라도 마귀와 같은 행동을 중단하라"고 조언해 준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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