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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한국의 대안운동]건설노동자협동조합 CNH종합건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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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한국의 대안운동]건설노동자협동조합 CNH종합건설(주)

입력
2003.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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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마천동 128-35. 마천사거리에서 마천 동사무소쪽으로 가다보면 4차선 도로 왼쪽에 6층짜리 건물이 새로 들어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흙은 요만큼만 파면 돼요." 삽질하는 인부 사이로 몸집이 좀 나는 중년 남자가 지시를 한다. 남자는 시멘트 벽돌을 붙이는 미장공 옆으로도 다가가 이런 저런 주문을 한다. 미장 경력 40년이라는 김창금(56)씨는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다시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 꼼꼼하게 하라는 데는 처음 봤어요"라고 말한다.이곳은 바로 우리나라 유일한 건설노동자협동조합 CNH종합건설(주)의 건설현장. 중년 남자는 이 회사의 현장소장인 정우용(46) 기술이사이다. "우리를 믿고 집을 맡겼으니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요."

CNH종합건설은 건설노동자들이 공동 소유와 공동경영, 공동분배라는 이상을 내걸고 2000년 창립된 종합건설회사.각종 건축물의 시공을 맡고 있다. CNH는 cooperation, nature, human의 영어 머리말을 땄다.

이 회사가 다른 건설회사와 다른 점은 조합 형태로 운영된다는 데 있다. 사장은 없고 조합원들끼리 뽑은 대표만 있으며 조합원들이 협의하여 일거리를 정한다. 이익이 나면 공동으로 분배한다. 뿐만 아니라 수익의 10% 이상은 사회복지를 위한 기부금으로 내고 일반적립금은 물론 후생복지, 조합중앙회 적립금으로 수익의 50%를 적립하는 등 공익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이 회사의 연원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을 중심으로 빈민운동을 하던 허병섭 목사가 만든 일꾼두레가 모태. 일꾼두레는 허 목사가 불평등한 하도급과 과중한 업무, 불규칙한 수입원에 시달리던 일용노동자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조합원들이 건설현장의 일을 직거래로 맡고, 일이 없는 조합원들의 생계를 함께 책임져주는 최초의 건설노동자 조합이었다.

이 같은 건설노동자 조합은 92년에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도 생겨난다.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빈민지역 사회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주임신부 송경용)에 91년 화재가 났는데 이때 나눔의 집에서 이런 저런 도움을 받고 있던 봉천동의 가난한 사람들이 울력으로 이 집을 새로 지어놓았다. 이걸 본 송신부가 제안을 해서 역시 봉천동의 일용노동자들이 모여서 92년 나섬건설(나누며 섬기는 건설노동자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성실한 노동만으로는 조합을 꾸려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감이 적었다. 결국 93년에는 나섬건설과 두레일꾼이 합쳐져 나레건설(나누며 섬기는 건설노동자 두레)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레건설은 95년 10월 해체된다. 막노동만으로 맡을 수 있는 작업 자체가 적었을 뿐 아니라 봉천동 지역이 재개발 되면서 사람들도 흩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허 목사는 생태운동을 위해 전북 무주로 내려갔다.

CNH는 나레건설의 부족함을 보강하여 새로 탄생한 회사이다. 두레 나섬 나레가 모두 기능노동자 중심이었다면 이 회사는 기술자 중심이다. 조합원 6명이 모두 한 두 가지 기사 자격증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회사는 종합건설면허를 갖추어서 대형 건물 건축도 맡을 수 있다.

CNH 이승우(52) 대표는 "과거에는 200평 이하의 주택이나 150평 이하의 상가건물만 지을 수 있다 보니 수익이 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일자리 창출에만 급급할 수 밖에 없었다"고 차이를 비교한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이 대표는 무기수 출신으로, 대학졸업자에게만 가능한 1급 열관리기사 자격증을 감옥에서 딴 입지전적인 인물. 그의 삶은 출소 당시 '인간시대'라는 TV 프로그램으로도 소개됐다. "감옥에서 신영복씨와 김낙중씨에게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많이 배웠다"는 김씨는 89년 5월 출소했지만 자격증을 갖고도 사회에서 일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이 일용노동자. 거기서만은 아무도 과거를 묻지 않았다. 92년에 나섬건설이 만들어지자 이씨를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여기는 신영복씨가 추천해서 사무총장을 맡았다. 당시 대표가 송경용 신부였으니 실질적인 노동자 대표였던 셈이다.

정 이사는 봉천동에 살던 목수 출신으로 92년 나섬건설이 생길 때 이 대표의 권유로 건설노동자조합에 합류했다. 그는 나섬을 이은 나레가 망하자 일반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다. "일반 기업에 가니까 그제사 시간이 나더군요. 덕분에 틈틈이 공부해서 건축기사와 건축설비기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전체 도면을 읽을 줄 아는 기술자가 있어야 건설노동조합은 막일만 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정 이사의 자격증 덕분에 CNH는 종합건설면허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는 회사의 김나영 차장(인터뷰 기사)과 함께 교대로 현장소장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 CNH가 지은 건물은 6채. 가평에 있는 이 대표의 친구 집을 시작으로 나눔의 집 자활센터, 한벗 장애인이동봉사대 같은 복지시설을 짓다가 정릉 다세대주택에 이어 신림2동에 영광클리닉이라는 병원 건물을 지었다. 지하2층 지상6층 연건평 770평의 이 건물을 열심히 지었더니 건축주인 의사가 병원 짓겠다는 다른 친구를 소개해줬다. 그래서 짓게 된 것이 지금의 마천동 건물. 건설경기가 올해는 작년에 비해 턱없이 나쁘다지만 CNH의 매출액은 여전하다. 건축주가 추천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집이나 건물이나 건축주에게는 있는 재산을 다 털어 짓는 것 아닙니까. 내 돈처럼 귀하게 쓰고 튼튼하게 지어드려야지요"라고 이 대표는 말한다. 이 때문에 CNH는 일용노동자들에게 다른 곳보다 품을 더 쳐주지만 '워낙 일을 세게 시켜서 힘이 더 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그 때마다 이 대표는 "우리랑 집을 지으면 저 집을 내가 지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설득한다고 한다. 수익을 남기기 위해 자재를 덜 쓰거나 헐한 재료를 쓰는 법은 절대로 없다. 결국 수익을 맞추기 위해 줄어드는 것은 조합원들의 임금이다.

세 사람이 시작했던 CNH는 규모가 커지면서 지난해 대학 건축과 출신의 건축기사 정보현(27)씨를, 올초에 역시 건축기사 이승현(30)씨를 고용했다.(조합원으로는 경리가 한 명 더 있다.) 이들의 월급은 120만원 정도. IMF로 줄어든 중소기업 임금 수준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직함은 대표와 이사, 차장으로 더 높았지만 창업멤버 3명은 지난 달까지 이보다도 훨씬 적은 월급을 가져갔다. 그런데도 정보현씨는 "대학 동기들이 일하는 현장과 비교해보면 원칙대로 일할 수 있고 하도급 업체에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니까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이 회사는 이렇게 하면서도 2001, 2002년동안 매년 2,000만원씩을 사회복지기관에 기부금으로 내기도 했다.

이 대표는 "수익이 나면 조합원들에 대한 대우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며 "아직은 기술자들 중심으로 조합원이 구성되어 있지만 앞으로 커지면 기능노동자들도 조합원으로 동참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 현장소장 김나영씨

CNH종합건설의 여성 현장소장인 김나영(32) 차장은 건설노동자협동조합에 동참하기 위해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그가 건설노동자협동조합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홍익대 건축과 2학년 휴학중이던 92년. 당시 김씨는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공부방 교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나섬건설 사무실이 바로 공부방 옆에 있었다.

"내가 할 일이 없을까 살펴봤지만 생각만 앞서고 경험이 없다보니 할 일이 없더라"는 김씨는 96년 대학 졸업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대기업의 건설현장을 쫓아다니며 실무를 야무지게 익혔다. 건설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건축기사와 안전기사 자격증은 물론 건축시공기술사 자격증도 땄다.

"시간 날 때마다 나눔의 집에 가서 (봉사활동) 일을 시켜달라고 했지만 멀쩡한 직장을 다니니까 무슨 일을 하라는 말을 않더라구요." 그래서 김씨는 회사에 사표부터 냈다. 그때가 2000년 3월. 그 길로 CNH에 합류했다. 이승우 대표는 옆에서 "우리 회사로 오고 월급이 5분의 1로 줄었어요"하고 보탠다.

건설현장의 현장소장은 아침 6시반이면 현장에 나와서 오후 7시반 최종 마무리까지 책임져야 하는 사람. 게다가 대부분 연장자이자 남성들인 현장 일꾼들의 업무를 지도 감독해야 한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여성 소장의 지휘를 받기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대방의 능력을 서로 인정하는 분위기라 여성으로서 힘든 점은 따로 없다"는 김씨는 "개인시간을 전혀 내지 못해서 현대건설 때도 하던 공부방 자원봉사를 하지 못하는 게 유일한 흠"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정전문가가 없는 회사를 위해 요즘 퇴근 후에는 회계학원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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