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출신의 청년은 10여 일을 굶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몰골이 형편 없었다. 내가 "너 이러다간 큰 일 나겠다. 나랑 함께 가자"며 타이르듯 다가가자 청년은 "범인은닉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아십니까"라며 도리어 대들 듯 되물었다. 나는 "걱정마라, 네가 최근까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문제없다"며 달래서 겨우 그를 농장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농장에 도착한 뒤 청년이 이번에는 수중에 있던 돈5만원을 불쑥 내밀며 "이제 돈이 필요 없으니 선생님이 가지세요"라며 건넸다. 짐작컨대 빈손으로 눌러 앉기가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풀무원 농장은 돈도 필요 없고 일만 하면 먹을 수 있다"며 자세히 가르쳐주고 "다음에 독립할 때를 생각해서 챙겨두라"며 도로 돌려주었다.
그렇게 청년은 풀무원 식구가 됐다. 청년은 자신을 박희성이라고 소개했지만 출신이나 지나온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한 열흘쯤 열심히 일했을까. 하루는 밭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쉬다 말고 "이렇게 땀 흘리며 고생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룻밤이면 큰 돈을 벌 수도 있는데 이해가 안갑니다"라고 불쑥 물었다. 내가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박 씨는 "사는 게 쫓고 쫓기는 스릴이 있어야지 원, 도저히 답답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친구가 있는 부산으로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겠습니다"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자리를 떴다.
하도 애원하는 통에 말릴 수가 없어 나는 경기 광주의 동광원이라는 수도단체를 소개해 주면서 다녀오라고 했다. 열흘 가까이 동광원을 다녀온 박 씨는 맘을 잡고 풀무원 생활에 적응해 들어갔다. 그러나 '깡패출신'답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수시로 말썽을 일으켰다. 이웃들과 사소한 시비에도 옷을 벗어 젖히고 나서는가 하면 패싸움도 예사로 벌였다. 그래도 다른 깡패들이 풀무원 식구에게 위해를 가할 때는 정의의 용사처럼 나타나 해결해 주는 의리도 가끔씩 보여줬다.
박 씨는 풀무원에서 농삿일을 하고 교회를 다니는 생활로 몇 년을 보냈다. 그 뒤 독립해서 어느 병원의 수위로 취직해 잘 다니다 최근에 병으로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박 씨는 괜찮게 사는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어떤 사건에 연루돼 집을 뛰쳐나온 뒤에 깡패가 됐다는 말도 들렸다.
박 씨처럼 문제가 많은 경우에도 다들 2∼3년씩 신앙생활을 통한 교육과 농사훈련을 받은 뒤에는 다른 농장이나 공장 등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번듯한 직장에 취직도 했다. 그러나 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공동체에 들어와 몇 년씩 지내고도 자활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내가 주례를 섰던 사람으로 결핵환자가 돼서 나타난 여자가 그런 경우다. 한번은 김포에서 교회를 하는 친구가 연락을 해서 갔더니 내가 전에 주례를 섰던 안면 있는 여자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함께 기숙하고 있었다. 친구는 결핵에 걸려 시집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여자를 데려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 많은 아이들을 환자와 함께 두면 어떡 하느냐. 사랑도 분별이 있어야지"라고 나무란 뒤 여자를 풀무원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풀무원에도 내 자식들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은 비워둔 게 하나 있어 거기서 지내면 됐지만 식사 등의 공동생활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본인의 밥그릇을 따로 챙겨 먹고 아이들이 덤벼들 때도 보듬지 말고 물리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여자가 그렇게 몇 년을 사는 동안 다행히 아이들이 감염되지는 않았다. 뒤에 여자는 기도원 같은 곳으로 옮겼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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