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이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결정적으로 유리하다는 증거는 사실 찾기 힘들다. 축적된 자료를 냉정하게 해석하면 개방을 하든 말든 후진국이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개방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후진국의 화려한 성공담 뒤에는 반드시 수출주도형 경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무시해도 좋은 작은 나라가 아닌 인구대국이라는 점은 개방에 한층 더 무게를 실어준다. 과거의 한국, 1990년대의 중국과 인도, 동구권 국가들이 바로 그러한 나라들이다.
따지고 보면 북한경제는 정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가난 속에서 세계적으로 희소한 성공을 이룩한 동북아의 중심에 들어서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최빈국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필자가 확신하는 것이 있다. 북한은 경제정책에서 완전히 실패한 국가이며 인민을 조금이라도 위한다면 경제정책을 당장 전환하여야 한다는 것을. 또 북한이 철도와 가스관을 연결시키고, 개성공단을 활짝 열고, 연수생들을 남한에 파견한다면 현재 핵무기 개발과 맞바꾸려는 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문학적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으리라는 것을. 단 하나 마음에 무겁게 걸리는 의문은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도 북한의 공산당이 중국에서처럼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북핵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토론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지, 반주체 정서가 주민들 사이에 얼마나 존재하는지, 이번 여름의 비로 식량사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정부는 어떻게 대북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인지. 그저 위성사진 속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북한의 모습에 의존해야 하는 것인가.
북한에 가본 적이 없는 필자가 요즘 북한을 생각할 때마다 위성사진처럼 머리 속에 떠올리는 잔상이 하나 있다. 지난 여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여자 축구 결승전에서의 한 장면이다. 일본과의 경기에서 우승이 확정된 순간 북한의 미녀응원단이 일어섰다. 그리고 유명한 '어디 계실까 그리운 장군님'을 불렀다. 홍민이 노래했던 '고향초'를 연상시키는 슬픈 곡조였을까. 아니면 눈두덩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고운 모습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가사가 주는 거부감보다는 처연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늘 그렇듯이 이 장면에 대한 반응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확연히 갈린다.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이는 응원단의 모습에서 이기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를 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 장면은 북한정권의 악랄성에 대한 증거사진이고 그 가식적인 모습이 구역질이 난다고 한다. 둘 다 이해는 가지만 이런 반응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고 싶어진다. 전자의 반응에는 인권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한 증오가 잔뜩 배어 있다. 후자의 반응에는 김정일 정권에만 국한되지 않은, 북한 주민 전체에 대한 적개심이 깔려있다.
필자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붉어진 눈시울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눈초리를 의식한 가식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학습된, 그래서 이제는 자연적인 것과 구별할 수 없어진 감성의 표출인지. 그리고 가식이었으면 참 좋겠다고 희망해본다. 하지만 그 장면을 아무리 되새겨 보아도 가식은 아닌 듯 하다. 만일 북한 주민의 대다수가 북두칠성 별빛 아래서 아버지 장군님을 그리워하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위원장이라면 이런 주민들 앞에서 감히 개방정책을 감행할 수 있을까? 장군님 노래의 곡조가 한층 더 슬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추론이 도달하는 곳 때문일 것이다.
송 의 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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