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그것을 대상으로 해부하고 분석하여 딱딱한 논리를 전개하는 연구서에서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던 곳으로 나를 인도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내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보여 주어야만 한다.또한 연구서가 그러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저자가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계로 독자를 이끌고 갈 만한 논리 전개의 치밀함이 있어야 하고, 그 치밀함은 독자가 저자와 동행하기 쉽도록 독자가 걸어가는 길을 부지런히 치우고 평평하게 고르는 성실함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생성론의 탐구―텍스트·초고·에크리튀르'는 이러한 화려함과 치밀함과 성실함으로 감동을 안겨주는 책이다.
저자는 나고야대학 문학연구과 교수인 마츠자와 카즈히로(松澤和宏). 전공은 불문학이다. 이 책은 플로베르의 작품도 분석하고 있지만 주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을 비롯해 일본 근대문학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성론'이라는 분석방법을 취하고 있다. 생성론은 작가의 육필원고(초고)와 인쇄물로 출판된 텍스트를 비교분석하여 텍스트의 생성 과정을 연구하는 방법이다.
중간중간에 첨가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초고를 글자 한 자 한 자에 주목하면서 면밀히 살펴보면 인쇄된 텍스트만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세계가 분명하게 떠오른다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연구방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작가의 육필원고가 남아있어야 하고 연구자가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자료로 삼은 육필원고들은 이미 사진판으로 출간돼 공개된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연구가 나오게 된 바탕에는 그 이전에 육필원고를 소중하게 보존한 이들이 있었고, 그것을 사진판으로 출판해 누구나 접할 수 있게 해놓은 출판계의 노력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문학의 출발은 자료이며 그 발전은 자료의 공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1960년대에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소리 소문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이상(李箱)의 육필원고를 떠올렸다.
이런저런 책에 몇 장의 사진만 덜렁 남겨놓고 종적이 묘연해진 그 원고뭉치는 지금은 어디에 고이고이 숨어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영 존재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일까. 만일 그 원고가 사진판으로 출판이 된다면 누군가가 지금까지의 이상 문학 연구와는 또다른 신선한 감동의 세계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수 있을 텐데.
황 선 영 비교문학·문화 도쿄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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