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일도 없는데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고, 투명하리만치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눈물이 고이는가. 그렇다면 분명 가을을 앓고 있는 것일 게다. 술 기운이나 빌려 그리 길지 않을 계절을 애써 피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느리게 걸으며 이유 없는 쓸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LP는 여러모로 가을과 많이 닮았다. 다시 꺼내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을 데우며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조심스레 닦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카트리지를 살포시 내리는, 느릿하면서 조용한 과정이 또 그렇다. 예전엔 다소 거슬린다고 생각되던 잡음도 이젠 낙엽 타는 냄새를 닮은 듯 하다. 앙증맞은 크기와 티 없는 소리를 자랑하는 CD를 제쳐두고 아직도 많은 이들은 굳이 LP만을 찾는다. 12인치의 검고 둥근 판 안에서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LP의 매력은 무엇일까.음악감상실의 추억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이석우(46)씨는 요즘도 가끔 25년 전 구입한 캣 스티븐스의 LP를 꺼내 '모닝 해즈 브로컨(Morning has broken)'을듣곤 한다. 한창 음악에 빠져 있었지만 라이선스 음반도 비싸 주로 '빽판(복사판 LP)'에 의존했던 젊은 시절, 처음으로 구입한 오리지널 판이기에 지금까지도 재산목록 1호다.
"군대에 간다고 주위에서 용돈을 넉넉히 주셔서 처음으로수입 원판을 샀습니다. 대학생 한달 용돈이 1만원 하던 시절에 수입 음반 한장 가격은 2만원 정도였으니 평소에 엄두를 못낼만도 하죠. 그랬으니 얼마나 좋았는지 상상이 가시죠? 요즘도 가끔 일상이 무료해지면 이 음반을 꺼내 들으며 입대 전 느꼈던 묘한 '멜랑꼴리함'을떠올리고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40∼50대에게 LP는 '추억'이라는단어와 톱니처럼 맞물려 있다. '필하모니' '돌체' '르네상스'…. 턴테이블은커녕 변변한 라디오 하나 갖춘 집도 드물던 70년대, 음악에 목마른 이들이 찾던 유명 음악감상실의 이름이다. 당시 다방에서 팔던 커피 값의 1.5배에 달하는 600원 정도를 내면 한잔의 음료와 함께 종일 음악을 들을 수 있던 그곳은 사랑을 속삭이고 꿈을 노래하며 번민에 휩싸인 젊은이들로 늘 넘쳐났다.
가정용 오디오가 보편화되면서 음악 감상실이나 음악 다방은 모습을 감췄지만 칠판에 곡 제목을 적던 DJ와 끊임 없이 돌아가던 턴테이블, 그리고 감상실 안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에 얽힌 빛 바랜 추억들은 이제는 중년이 돼버린 당시 '신세대'들의 손을 자꾸 LP로 향하게 한다.
'음반의 황금시대'를 돌아보며
세계적으로 LP가 쏟아져 나오던 1950∼60년대는 소위 '음반의황금시대'라고 불리며 역사상 음반 제작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시기였다. '이사람을 거치지 않고는 출세하기 어렵다'고 소문난 월터 레게 같은 프로듀서는 당시 사회에서 현재의 빌 게이츠 만큼 대단한존재로 추앙 받았다. 뛰어난 인재들은 음반 제작자가 되기를 희망했고 이들은 '최고의음반'을 탄생시키기 위해 많은 욕심을 냈다. 백여명의 오페라단을 스튜디오로 불러 오페라를 녹음하는 것 같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초대형 기획도 많이 탄생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CD가 음반시장을 휘어잡으면서 판매를 위한 LP 제작은 1994년쯤 사실상 중단됐다. 노병은 죽지않는다던가? 이후 LP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귀성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지니며 마니아들 사이에 소장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새롭게 평가 받고 있다.
1988년부터 중고 LP를 팔아온 청계천 '숭일레코드'의 김승경 사장은 "LP를 골동품이나 헌책 같이 모아두고 소장하는 것 자체로 의미를 찾는 사람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었다"며 "근 2∼3년 사이에는 LP에 얽힌 추억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디지털 문화가 몸에 뱄을 것 같은 20대 젊은이들 중에도 LP수집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말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중고 LP를 사고 파는 온라인 장터가 많이 생긴 것도 LP수집가의 수를 늘리는 데 한몫 했다.
음악에 대한 경건하고 느린 자세
LP를 사랑하는 이들이 말하는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제작부터 듣기까지 모든 과정에 포함된 '느림의 미학'이다. IMF환란 이후 이어진 경제위기를 겪으며 그 동안 자랑으로 삼았던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회의와 앞만 보고 달렸던 것에 대한 반성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사람들은 느린 것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본 녹음 후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손질을 하는 CD와는 달리 LP제작에는 실제로 판을 깎아내는 물리적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거의 유일한 LP 원판 제작 기술자인 고희정씨는 "빈 LP에 바늘이 지나갈 수 있도록 가느다란 길을 깎아내고 혹시나 바늘이 튀는 일이 없도록 몇 번이고 골을 일일이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CD 제작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디스크가 불이 잘 붙는 재질로 되어 있어서 옆에는 헬륨통을 두고 몇 시간이고 판을 깎아내는 고씨의 작업모습을 본 이들은 일종의 경건함까지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이렇게 만들어진 LP를 듣는 이들의 호흡 역시 빠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비닐에서 커버를 조심스럽게 빼내 판에 묻은 먼지를 융단 같은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낸 후 턴테이블에 이를 얹어 놓고 바늘을 내려 놓는 데만도 5∼10분은 족히 투자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모아놓은 LP가 500여장에 달한다는 회사원 정규민(43)씨는 "리모콘으로 쉽게 켜거나 끌 수 있는 CD를 듣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노력은 거의 '제로'에가깝다"면서 "이와 달리 LP로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행하는 일련의 준비 과정 속에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지니게 하고 삶에 대해 잠시라도 돌아보게 하는 것이 LP의 진정한 매력"이라고강조했다. 그는 또 "음악이 시작되기 전후와 음악과 음악 사이 빈 공간에서 들려오는 작은 잡음소리도 LP에 중독되게 하는 요소"라고 덧붙였다.
20∼30분 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LP를 뒤집는 것도, 다 들은 후 다시 판을 닦고 커버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모두 기계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과정이다.
"LP를 꺼내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과 손 끝에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촉감, 그리고 한 장의 예술작품을 방불케 하는 음반 재킷 등 CD가 주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LP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CD를 듣는 것이 단편소설이나 수필을 읽는 느낌이라면 LP는 두꺼운 장편소설과 비슷합니다. 여기에 시간과 기억의 무게까지 더해져 LP만이 갖는 따뜻함이 완성되는 것 아닐까요." 고등학교 때부터 LP에 미쳐 살아온 '오리지널' LP 수집가로, 지금 중구 회현동에서 중고LP 매장인 '클림트'를운영하는 김세환(43) 사장의 얘기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 최규성·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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