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뜨거운 막바지 여름날, 본적지인 마산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아는 이 없는 쓸쓸한 입대길이었지만 외로움을 느낄 순간도 없이 호송군인의 얼차려가 시작됐다. 논산훈련소로 가는 길은 길게만 느껴졌다.땀과 눈물로 얼룩진 훈련기간이 끝나갈 즈음, 휴식 시간에 사격훈련장 잔디에 누워있던 나는 얼굴 전체에 진물이 흐르는 피부병에 걸렸다. 표시는 안했지만 다들 옮을까 피해 다니는 느낌이었다. 며칠 후면 보충대로 떠나야 했다. 내무반장이던 하사는 "여기서 귀향하면 다시 입대해야 한다. 그동안의 땀이 아깝지 않느냐. 선택은 자유다"라고 했다.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동여매고 101보충대행 트럭에 몸을 실었다. 보병 제16연대에 배치되어 의무실에서 3주 정도 치료를 받고 완쾌해 제3대대 11중대 3소대에 전입신고를 했다. 자대 배치가 늦었던 관계로 동기도 없고 여린 성격이라 두려움은 더했다. 32명의 소대원 중에는 나보다 7개월 정도 먼저 입대한 전라도 출신 4∼5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제1분대 2번 소총수로서의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달리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들보다 내게 더 잘해줬다. 물론 잘못했을 때의 체벌은 예외였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지역감정을 믿지 않는다. 다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왕고참인 경북 의성출신 이운희 상병 덕이 컸다. 그 분은 전역할 때 나를 잘 봐주라고 특별히 부탁하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3사출신의 유무종 대위가 중대장으로 새로 오셨다. 그 분은 내가 가장 나약해 보였던지 공식석상에서 내가 꼭 이름을 복창하게 했다. "옛! 일병 김무현!" 그 바람에 전 중대원이 나를 기억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분이 아니었으면 제대로 군 생활을 마쳤을지 의문이다. 더불어 군 생활을 거의 함께 하며 피눈문을 나눴던 정현주, 손정식, 채창수, 김영중, 강문선, 천문한, 그리고 별명이 악어였던 화기소대 바로 위 고참과 중대 통신병 시절 사수였던 이경희와 조수 모승원…. 모두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나처럼 지난 세월의 젊음을 뒤돌아보며 아쉬움에 젖어 있지는 않는지?
이제 세월이 흘러 아들의 군입대 통지서를 받아보니 주마등처럼 여러 전우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skymir25@hotmail.com 으로 연락 주시길.
/김무현·부산 서구 아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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