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1995년 12월 여자국가대표 핸드볼 팀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 여자핸드볼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순간이었다. 당시 핸드볼 협회장이었던 나는 경기 후 샴페인으로 목욕을 하며 선수들과 얼싸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우리 구기 종목 사상 첫 세계선수권 제패라는 사실도 큰 기쁨이었지만 절정을 맛보기까지 함께 했던 고생이 우리를 감동으로 한데 묶어 준 것이다.대회를 앞두고 우리는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훈련했다. 그러나 선수들의 기량은 세계 최고였는데도 이상하게 우승은 장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체력문제 때문이었다. 코칭 스태프와 과거 대회를 분석해 보니 전반전에는 거의 경기를 이기고 있다가 후반에 역전 당하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코칭스태프는 히딩크 감독이 했던 것과 유사한 체력 보강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체력증진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대회가 2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회 임원과 코칭 스태프에게 선수체력 보강을 위한 나의 '비책'을 제시했더니 짐짓 놀란 표정으로 동의해 주었다. 그 비책을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태릉선수촌과 관련대학 교수의 자문을 구한 뒤 면밀히 검토한 끝에 마련한 것으로, 여성 체력 보강을 위한 일종의 특별 보양식 이었다.
우리는 곧 특급작전 실행에 돌입했다. 즉 여성의 체력을 획기적으로 보강해준다고 확인된, 이브를 꼬드겨 선악과를 먹게 한 그 주인공을 사로잡기 위한 계획을 집행한 것이다. 일단 중국산이나 여타 수입품이어서는 안 되며, 이 땅의 정기를 받고 올곧게 자란 것이어야 했기에, 강원도 소재 관련 단체 책임자의 도움으로 직접 조달했다. 또한 협회 임원이 음식물로 처리하는 과정을 옆에서 일일이 지켜보며, '품질관리'를 철저히 했다. 만일 그 안에 든 곤충이나, 건강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그대로 놔둔 채 요리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단 선수들이 음식 맛을 잃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그 보양식의 이름은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래서 한 식당 주인과 상의해 여성들이 가장 먹기에 좋은 음식으로 만들어 선수들이 출국하기 전에 몇 차례 섭취하도록 했다. 남성인 나도 태연하게 선수들과 함께 그 음식을 먹었는데, 그 맛이 지금도 혀끝에 생생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반드시 그 음식 때문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기하게도 95년 세계선수권은 우리 선수들의 역전 드라마가 백미였다. 선수들은 '벌떼'작전이라 불리는 독특한 전법을 구사하며, 후반 들어 오히려 체력이 솟아난 듯 펄펄 날았다. 경기 내내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과시하며 우리는 마침내 우승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간절한 기원을 넣어 고아 만든 '건승탕'도 한 몫 단단히 한 게 아닌가 싶다.
구기종목 월드컵 우승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선수들이 기뻐하던 모습과 함께, 그 선수들의 체력 보강을 위해 강원도 오지를 뒤지며 펼쳤던 우리의 '비밀특급작전'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신 박 제 (주)필립스전자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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