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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8> 시련으로 다가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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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8> 시련으로 다가온 전쟁

입력
2003.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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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으로 내려간 첫해에는 매부와 매부의 식구들 몇몇 정도가 함께 모여 살며 농사를 지었다. 가끔씩 미군 군목들이 전쟁고아나 불쌍한 사람을 데려오긴 했지만 공동체는 아니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가족공동체라 할 수 있겠다.농사를 시작하면서도 시련은 계속됐다. 넓은 밭에 주로 포도를 심었는데 농사에 사용할 비료는 늦어도 2, 3월에는 확보해야 하는데 4월이 되도록 비료가 나오지 않았다. 알아보니 포당 500원이던 비료는 이미 시중에는 2,000원에 나돌고 있었다. 당시 비료는 외국에서 전량 수입해 정부에서 나눠주었는데 뒷구멍으로 빠져나와 배급할 물량이 떨어진 것이다. 제때 비료를 받자면 뇌물을 찔러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정과 불의의 손을 씻자고 시작한 농사일인데 어떡할 건가. 비료가 없으면 포도농사는 포기해야 하는데…' 그 때 누군가 "다른 밭에 심은 고구마만 먹고도 충분히 살수 있습니다"며 거들었다. 바르게 살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첫 해 농사를 짓고 이듬해 전쟁이 터져버렸다. 전쟁은 내 인생에 또 한번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바른 삶을 실천하고 전도하는 일에 열중할 기회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더구나 이념대립의 전장은 바르게 살려는 나의 의지를 시험하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고도 피난갈 여유는 충분했다. 특히 주변에서는 '기독교인인데다 땅도 적지 않은 지주계급이라 북쪽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당할지 모른다'며 빨리 피난길에 오를 것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초보적이나마 공동체 생활이 시작돼 노인과 아이들도 있었기에 나 몰라라 하고 우리 식구만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피난을 가지 않고 부천에 머물던 어느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좌익계열 사람이 다가와 지역 치안유지회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남쪽 사람들은 다 피난가고 아직 인민군은 도착하지 않아 치안공백 상태가 걱정된다는 읍소였다. 성화 같은 부탁을 물리치기도 어려워 나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어느집 머슴살이를 하다 치안유지회 회장이 됐다는 사람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큰 충돌은 없었다. 인민군이 내려오면서 마을마다 정치공작원들이 배치돼 치안유지도 체계가 잡혀갔다.

그러던 어느날 치안유지회 위원장이 이상한 명단 하나를 들고 정치공작원 앞에 나타났다. "이놈들은 악질적인 우익 대동청년단원들인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놈들은 모조리 숙청해야 하겠습니다"고 그가 제안했다. 그러나 명단에 적힌 이들은 대부분 착한 청년들이었다. 나는 "무슨 근거로 반동으로 몰아 숙청을 한단 말이오. 구체적으로 나쁜 일을 했다는 증거를 적시해야 할 것 아니오"라고 대들었다. 그러자 듣고있던 정치 공작원은 "그건 동무 말이 맞소"라며 내 편을 들어줬다. 비록 사상이나 처지가 달라도 바른 신념은 서로 통한다는 확신을 갖도록 한 소중한 한마디였다. 그 후 정치 공작원과는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며 마을을 떠날 때까지 사귀었다.

이 정치공작원은 그 뒤에도 나의 원군이 돼줬다. 한번은 인민군에게 무작정 끌려가 부천 소사읍 사무소에 갇히게 됐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나는 "종교인이라 당원될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그 때 따귀를 잘못 맞아 고막이 터지는 바람에 지금도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한달가량을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났는데 알고보니 그 정치공작원 덕분이었다. 그 정치공작원이 나중에 돌아갈 때 시계하나를 부탁해 내가 차고 있던 걸 준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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