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취재하다 보면 스스로의 무식함을 탓할 때가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는 게 가능할까요. 세상의 모든 학문에 정통해야 합니다. 역사, 종교, 지리, 지질, 기후 등등. 심지어 간단한 자동차 정비 지식도 필요합니다. 이미 한계를 느끼고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대신 대가들이 잘 정리해 놓은 것을 빌려 쓰고 있죠.개인적으로 가장 머리 속에 정리가 되지 않는 분야는 바로 식물입니다.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이죠. 시골에서 식물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한 이들에게는 쉬운 것인지 몰라도, 도시에서 산 사람의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우선 식물의 종류가 무척 많습니다. 같은 종류라도 또 달리 분류됩니다. 참나무를 예로 들어 볼까요.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입니다. 상수리나무라고도 하죠. 참나무는 종류가 250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수목에 관심이 조금 있다면 대개 알 것입니다. 돌참나무, 봉동참나무, 홍갈참나무, 개졸참나무…. 이 정도 되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나의 식물이 여러 이름을 가진 것도 많습니다. 꽃무릇이 그렇습니다. 꽃무릇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한자 이름은 석산(石蒜)입니다. 그리고 상사화로도 불리죠. 꽃과 잎이 평생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낭만적이고 슬픈 이름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식물학자들은 꽃무릇이 진짜 상사화와는 자매간일뿐 엄밀하게는 서로 다른 식물이라고 말합니다. 괜히 남의 이름을 빼앗았나요?.
선운사의 꽃무릇을 취재하는 동안 세 개의 이름이 머리 속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가슴으로는 꽃의 자태와 색깔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따지면 느낄 수 없다.’
사진기를 가방에 넣고 편안한 마음으로 개울가에 앉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꽃무릇을, 석산을, 그리고 상사화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제서야 붉은 융단 같은 꽃밭이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습니다. 양말을 벗고 개울에 발을 집어넣었습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워진 개울물. 그곳에는 가을이 와 있었습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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