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3일 확정한 내년 예산안은 어려운 나라 살림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침체된 경기의 부양, 서민·취약계층의 사회복지 증진, 자주국방 역량 강화 등 돈 쓸 곳은 많은 반면 경기 침체로 세입 여건은 극히 불투명하다. 정부는 고민 끝에 6년 만에 달성한 균형재정을 2년 연속 이어가기 위해 적자국채 발행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살림을 선택했다.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은 "국채 발행을 통한 세출확대도 검토했으나, 미래의 재정위험 요인에 대비하고, 대외 신인도를 고려해 균형예산을 짜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태풍 피해로 올 성장률이 2%대로 추락하고 내년에도 4%대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긴축 예산' 편성으로 인한 잠재성장률 저하를 걱정하고 있다.예산증가율 정부 수립 이후 최저
내년 예산안은 117조5,000억원으로 올해 115조1,000억원보다 2.1%(2조4,000억원)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는 일반회계 기준(추경포함)으로 정부 수립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정부는 "공기업 매각이 마무리돼 세외수입이 줄어든 데다, 세계잉여금(쓰고 남은 세금)도 올해 추경예산으로 모두 소진, 내년 세입증가율이 크게 떨어질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예산처 관계자는 "올해 공기업 주식매각 등 세외수입이 10조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되나, 내년은 이보다 44.1% 적은 6조원에 그칠 전망"이라며 "경기 침체로 법인세 등 세수상황도 좋지 않아 예정됐던 2조원의 공적자금 상환도 2005년 이후로 미뤘다"고 말했다.
복지·국방 분야 집중 배려
긴축예산 속에서도 복지와 국방쪽은 집중적인 배려를 받았다. 사회복지 분야는 올해 11조1,266억원보다 1조285억원(9.2%) 늘어난 12조1,551억원으로 분야별 예산증가율 1위를 기록했다. '분배정의'를 강조하는 참여정부의 첫 예산 편성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사항인 '복지증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국방예산도 올해보다 1조4,264억원(8.1%) 늘어난 18조9,412억원으로 전체 예산 증가율보다 4배나 높았다.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8% 수준. 그러나 한나라당이 "경기 회복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국방비를 대폭 늘리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반대하고 있고,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도 국방비 증액보다는 사회복지 예산의 확충을 요구하고 있어 국회 심의과정에서 최대 쟁점이 될 전망이다.
경기 회복세가 적자재정 좌우
정부의 균형재정 구상은 올해 경제 성장률이 3%, 내년 실질 성장률이 5%대를 유지하는 상황을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나라의 올해 성장률을 미국보다 낮은 2.5%, 내년엔 4.7% 정도로 낮춰 잡는 등 내년에도 경기 회복이 불투명하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만일 경기 침체가 내년까지 지속될 경우 정부는 다시 추경 편성 등 재정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에 나설 수밖에 없어 적자재정이 불가피해진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올 정기국회에서 1조원 규모의 법인세 인하를 강행할 지 여부도 내년 균형재정 유지의 변수이다. 정치권과 경제계 일각에선 "과감한 재정정책으로 경기가 살아난다면 세수에도 보탬이 된다"며 정부가 2조원의 공적자금 상환을 늦추면서까지 '긴축 재정'에 집착하는데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국회 심의과정에서 격론이 예상된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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