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핵 폭탄 제조법은요?"강의 뒤 노(老)교수를 빙 두른 고1 학생들의 질문이 매섭고 당돌하다. 개교이래 첫 초청 강의라 강사도 교사도 학생도 긴장했을 터지만 물음도 대답도 진지하고 성실하다.
국내 첫 도시형 대안학교인 경기 성남 분당구 이우(以友)중·고교(2woo.net). 19일 중1(3학급 60명), 고1(4학급 55명) 전교생은 하늘터(강당)에서 자연과학 전반에 대해 첫 외부강연을 들었다. 이날 외부강사는 서울대 최무영(물리학과) 교수.
그 나이 또래는 감당하기 지루한 시간이었을까. 딱딱한 철제 의자대신 푹신한 매트가 깔린 하늘터에는 아이들이 벽에 기대거나 비스듬히 누운 채로 휴대폰 문자를 날리거나 친구들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학생들 틈에 낀 교사들의 불호령이 떨어질 법도 한데 눈치 보는 학생도, 한마디 걸치는 교사도 없다. 화장실 가는 녀석들을 붙잡자 "지금 내용은 아는 거라…" "제 관심분야가 아닌데요" 하며 해맑게 웃었다.
처음으로 중고생 수업을 했다는 최 교수의 반응이 궁금했다. "산만한 게 아니라 자유로운 거죠. 어려운 주제라 100분 동안 버티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요, 중학생인 듯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끄덕, 내용을 미리 앞질러 말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기대가 됩니다."
1일 개교한 이우중고 학생들의 첫인상은 맑고 당당했다. 안서영(16·고1)양은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게 지긋지긋했는데 여기선 자유롭게 토론하고 질문 하는 분위기라 스스로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황톳길 따라 광교산 숲 자락이 포근하게 안아주며 개울 졸졸 흐르는 학교건물은 '환경과 더불어'다. 교단도 없는 교실에는 토론수업을 위해 사다리꼴, 반원형으로 배치된 책상이 눈에 띄었다. 학생들 신체조건에 맞게 특수 제작한 책받침 책상과 방석 의자, 각도 조절이 가능한 미술책상 등 아이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친환경 지열난방과 확 트인 교실 발코니 역시 이우만의 자랑.
하지만 이우중고 최고의 자랑거리는 역시 새로운 교육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학생들이다. 이광호(국어) 교사는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 찌들어있던 아이들이 슬슬 자기 의견도 말하고 A4 용지 4매 분량의 토론 과제도 척척 해내는 걸 보면 대견하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든 일을 '벗과 더불어(以友)' 스스로 결정한다. "오늘은 화장실 쓰레기통만 비우면 될 것 같아. 내일은 대청소하자"는 청소시간 재잘거림을 듣던 교사들은 "처음엔 무제한의 자유가 자칫 무질서가 될까 걱정했는데 적응이 빠른 편"이라고 만족해 했다.
이우의 교육과정은 학생과 교사가 함께 만든다. 기본 틀은 7차 교육과정을 따르지만 각 과정마다 토론과 체험학습을 보충하고 노작(勞作), 도제 교육 등 다양한 특성화 교육을 실시한다.
남녀 구별 없이 바느질 요리 목공 철공 등을 함께 익히고 서로 돕는 모듬별 활동으로 생활협동조합 등을 운영할 예정이다. 농사 원예 동물 기르기 등을 통해 생명과 환경의 소중함도 몸소 체험한다. 또 작은 학교와 전인교육을 위해 중·고교 6년 과정 통합(4+2 학제), 학급 규모 20명, 학생의 담임 선택과 6년 연속 담임제, 수업시간은 교시(50분)가 아닌 '블록(90분)'제 등 교육개혁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수십 가지 학원에, 밤잠까지 설치는 '입시지옥'에서 이우의 원대한 교육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는 건 당연한 일. 또 '사교육1번지' 강남권에 위치한 탓에 엘리트교육이나 또 다른 특수목적고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래서 이우 학부모들은 "입시 때문에 정해진 교육과정을 어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고, 아이들은 앞 다퉈 다니던 학원을 정리하고 학교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방송기획PD, NGO 활동가, 산악인 등 다양한 경력의 교사들은 수업내용을 모두 공개해 교육 투명성을 높였다. 정광필 교장은 "아이들 마음의 착한 싹을 틔워 적성에 맞는 열매를 맺은 다음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이우인의 목적지"라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만큼 끈기 있게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성남=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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