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을 만든 비주얼리스트 감독 민병천의 차기작은 아주 늦게 도착했다.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기동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2080년 미래세계의 암울한 분위기를 담은 이 작품은 무려 5년의 산고를 치른 끝에 나왔다.그러나 5년 간 200번 고쳤다는 시나리오의 힘은 기대를 채워주기엔 조금 부족하다. 힘겹게 싹트는 인간과 인조인간, 더 정확히 말하면 인조인간 제거요원 R(유지태)과 인조인간 리아(서린)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본 것이다. 뿐인가, 동남아풍의 시장 골목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산성비, 우주여행 광고 메시지와 남루하고 지친 사람들의 표정 대비, 우중충한 대기와 화려한 네온 사인이 겹치는 장면은 민 감독이 미래세계의 비전에 대해 앞의 두 영화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내츄럴 시티'가 2년 전 줄줄이 무너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걸작으로 꼽히는 앞의 두 영화와 어떻게 차별성을 두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냐이다.
제작비 76억원을 쏟아 부은 이 작품에 일단 평단은 시각효과의 뛰어남에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줌으로써 우회적으로 영화의 성긴 이야기 짜임새에 비판적 자세를 보였다. 이는 올해 개봉한'튜브'나 '원더풀 데이즈'가 걸었던 길과 상당히 비슷하다.
휴대용 컴퓨터로 인조식물을 키우는 사이보그 쇼걸, 가상 해변, 왕자웨이 감독의 '타락천사'를 연상케 하는 두 연인의 오토바이 질주 등 참신한 발상과 감각적 화면, 100% 디지털작업으로 후반작업을 통해 얻은 일관되고 안정된 톤은 주목할 만하다. 문제는 '매트릭스'나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할리우드 대작 SF에 길든 관객의 눈높이에 맞을 것이냐이다.
이야기의 힘은 관객의 눈높이에 이르기엔 힘이 부쳐 보인다. 수명이 7일밖에 남지 않은 사이보그와 사이보그 제거요원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사람과 사이보그와의 사랑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왜 R은 리아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감독은 세련된 비주얼 이미지만으로도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의 애절한 사랑을 관객이 충분히 납득하리라고 믿은 듯하다.
그러나 리아를 살리기 위해 매춘부 시온(이재은)의 몸에 리아의 기억을 이식한다는 설정은 사랑이 아니라 빗나간 도착에 가깝다. 무단이탈한 전투용 사이보그 사이퍼가 역시 같은 이유로 시온을 납치하면서 충돌이 빚어지지만, 액션 장면 역시 새로운 차원을 열지는 못했다.
관객이 화면 속으로 빠져들기에는 캐릭터의 숨결도 희미하다. R이 보여주는 자학과 위악의 캐릭터와 수동적으로 R에게 이끌려가는 리아의 평면적 캐릭터에서 미래사회의 사랑을 예감하기는 힘들다. 민 감독이 설계한 개성 있는 미래도시엔 조금 더 인간적인 숨결이 필요하다. 26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종도기자 ecr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