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은 서울서 다니게 된 종로구 돈의동의 '동신교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장모님이 중간에 적극 나서 결혼을 재촉했다. 공식적인 첫번째 데이트에서 나는 "여학교를 나와 타이피스트까지 하면 좋은 신랑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나같이 돈 없고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람을 택했소. 나는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나와 결혼하면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소"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묵묵히 듣고있던 집사람은 "제 생각도 경선씨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굳은 신앙심으로 바르게만 산다면 저는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이예요"라고 역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것은 어쩌면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바르게 살라는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결혼 후에도 사진사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정릉 골의 끔찍한 기억과 함께 넓은 세계를 접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조선반도가 나에게는 좁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결혼 이듬해 베이징(北京)행 열차에 올랐다. 베이징에서 집사람과 의논한 끝에 시작한 일이 인쇄소였다. 국내에서 배운 타이핑 기술을 살려보자는 뜻에서 집사람과 손잡고 동업을 시작한 것이다. 인쇄소 상호도 집사람의 성과 내 성을 따서 지원(池元) 인서사(印書社)로 지었다.
의외로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집사람의 타이핑기술이 그만큼 뛰어났고 유능한 조선인 청년들을 다수 고용했기 때문이다. 일처리 속도와 정확성이 알려지면서 일을 맡기는 일본 관공서의 주문이 쏟아졌다. 경쟁상대가 일본인이 운영하던 인쇄소였는데도 주문은 우리한테만 몰려왔다. 격차가 점차 벌어져 일본인 인쇄소는 주인과 중국인 직원 한두명이 고작이었는데 우리는 타이피스트 3명에 일반직원 20명으로 불어났다. 나중에는 시중가의 1.5배를 불러도 주문이 우리에게 떨어졌다. 납기일을 맞춰 정확하게 인쇄해 내는 곳은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은 약 3만명으로 대부분이 아편거래나 유곽 등 떳떳지 못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바르게 사업하는 사람은 사실 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정업(正業)을 하다보니 일본인에게 숙일 이유가 없었고 도리어 교만하게 행동하는 일본 관헌에게 호통까지 치며 생활할 수 있었다.
중국 생활은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국내에 볼일이 있어 기차를 타고 나올 때도 3등칸이 아닌 2등칸을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 결혼 6년 만에 첫아이 혜옥(蕙玉)을 낳았고 둘째아이까지 태어나 가정적으로도 안정됐다.
그러나 7년간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해방소식 때문이었다. 하루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중국인 교우가 찾아와 '조만간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귀띔해 주고 돌아갔다. 나는 주저없이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귀국선은 생각만큼 빨리 오지 않았다. 귀국선을 기다리면서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야금야금 빼먹어 귀국할 즈음인 해방 이듬해 5월에는 거의 자금이 바닥나 있었다. 더욱이 귀국선은 아수라장이었다. 비좁은 배 안에서는 악취가 진동했고 지치고 굶주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떠나갈 듯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인천항까지의 8일은 중국생활 7년보다 길고 지루했다.
그러나 고국에서는 더 참담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 꿈을 펼쳐 보자며 떠났던 중국에서 빈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에서 더욱 견실해진 것도 아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