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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씨카드 콜센터 상담매니저들/하루40만통 상담 "신용사회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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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씨카드 콜센터 상담매니저들/하루40만통 상담 "신용사회 밑거름"

입력
2003.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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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해봤을 전화 통화 내용.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카드를 잃어버렸는데요.", "네, 아직 사용한 금액은 없고요, 접수된 지금부터 고객님 카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는 "왜 카드가 안 되죠? 그저께까지 됐었는데…." "네, 은행 대출금 있으시죠? 이자 연체로 오늘 0시부터 거래가 중지됐습니다."신용카드사 콜센터에는 온갖 사연이 모여든다. 카드를 분실했다는 다급한 호소도 있고, 헤어진 애인이 빌려 쓴 카드대금을 못 내겠다는 억지도 있다. 고객 입장에서야 상냥한 여성 상담원들의 대답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면 그만이지만, 콜센터에 모여든 갖가지 이야기들은 그대로 모여 이 사회의 솔직한 자화상이 된다.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비씨카드 본사 5, 6층 콜센터(1588―4000). 800여명의 상담원들이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곳은 하루에만 40만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 카드사의 숨겨진 격전지이다. 엄순희(36·종합상담1), 유영미(29·인터넷 상담), 곽지선(27·거래승인), 최선영(27·분실접수), 최미라(25·종합상담2)씨 등 5명의 매니저들도 업무에 정신이 없다. 팀별 상담원을 총괄 지휘하는 이들 눈에 비친 우리 시대 모습은 어떤 것일까.

먼저 상담고객의 유형. 매니저가 되기 전 각자 3∼4년 하루 평균 150∼230여통의 전화나 인터넷 상담을 한 덕분에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고객인지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유형은 고객이 한 것은 무조건 맞고 상담원이 하는 것은 틀렸다는 '무대포형'. 가장 피곤한 고객이다. '카드를 많이 사용했으나 갚을 능력이 없다'는 '신세한탄형'이나 '다른 카드사의 서비스를 배워라'고 하는 '비교지적형'도 대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이들은 제 시간에 끊기라도 합니다. '나의 전화 한 통화로 카드업계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사회정의 구현형'이나, 끝가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사은품 요구형'은 정말 힘들어요. 1시간 30분 동안이나 설교를 한 고객도 있어요."(최미라)

다중채무자와 신용불량자가 폭증한 요즘 세태를 반영하듯 안타까운 사연을 호소하는 고객도 많이 늘었다. 부인이 카드 빚을 지고 가출을 했다며 카드를 사용한 위치만이라도 알려달라는 남편이나, 명품을 한두 개 사다 보니 500만원 빚을 졌다고 하소연하는 스무 살 여성의 전화를 받다 보면 하루가 울적해진다고 한다.

"2∼3년 전만 해도 아들이 카드를 몰래 훔쳐 사용한 경우에는 부모가 갚아줬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아들을 형사 고발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고객까지 있어요. 그만큼 살기가 각박하다는 걸까요?"(최선영) "대환대출이나 개인워크아웃제도를 활용해보라고 권유하지만 직접 도움을 줄 수 없어 안타깝죠.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한 과소비 풍조가 더 큰 문제에요. 이 같은 분위기가 장롱이나 지갑에 숨어있던 카드를 뛰어 나오게 한 것이죠."(엄순희)

허위신고나 욕설 반, 성희롱 반인 전화도 이들을 괴롭힌다. 아내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니 아내가 쓴 카드대금은 낼 수 없다고 거짓말하는 사람부터, 거래승인이 안 돼 가맹점 술집이 걸어온 전화를 낚아챈 취객까지…. 곽지선씨가 한 취객의 흉내를 냈다. "내가 한 달에 500만원을 버는데 왜 200만원밖에 하지 않는 술값 계산이 안 된다는 거야?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이런 식으로 전화 받으면 내가 밤마다 전화 걸어 괴롭힐 거야."

이런저런 험한 일을 겪는 이들이지만 한바탕 크게 웃거나 일에 보람을 느낄 때도 많다. 명세서 배달장소를 자택이나 직장 중에서 선택하라는 질문에 "월세 사는데요"라고 하는 사람, 주민등록번호를 말해달라고 했더니 자동응답(ARS) 목소리인 줄 알고 전화번호 버튼을 꾹꾹 누르는 사람…. 카드대금 연체로 마구 화를 낸 고객이 전화를 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면 상처 받은 마음도 금세 회복된다.

"상담원의 가장 큰 덕목은 고객 말을 끝까지 듣는 것 같아요. 서로 웃으면서 전화를 끊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최미라) "저도 다른 카드사 콜센터에 전화한 적이 있는데 직원이 제대로 일 처리를 못해줄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나부터 앞으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엄순희) 정성껏 상담해준 고객이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어 '잘 해결됐다. 고맙다'고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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