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내려가면 이스탄불의 신시가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화려한 구조물들 가운데 아름답고 웅장한 석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원래는 목조건물이었는데 큰불이 난 이후로 십여 년에 걸쳐 석조건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이 궁전을 재건하면서 든 비용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흔들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돌마바흐체 궁전의 화려함은 탄성을 자아낸다. 천정의 눈부신 돔들과 285개나 되는 방의 각각 다른 실내장식,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사방 벽의 색채, 이런 것들을 보면 당대의 호화스런 생활의 극치가 어떠했는지 엿볼 수가 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헌상했다는 홀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무게는 4.5톤이며 750개나 되는 촛불 램프가 켜져 있다.
이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후계자가 오르한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물러난 술탄의 왕자였던 그는 15세 때에 자전거를 타고 궁전 뜰에서 놀고 있다가 찾아온 대신들이 울면서 내민 서류에 사인을 한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그가 무심히 승인한 그 서류엔 24시간 안에 오르한을 비롯한 모든 왕족들이 무조건 국외로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남자는 50년, 여자는 28년 동안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하루 아침에 제국의 후계자에서 거지나 다름없는 빈손의 추방객이 된 오르한은 오스만 제국을 떠나 이집트에 머물렀다. 이집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르한이 가진 직업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이집트에 머물렀던 이유는 언젠가 터키로 돌아갈 수 있을 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이웃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오르한이 왕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집트인이 개인택시를 한 대 내주어 한동안 그걸 운전하기도 했지만 그게 뉴스를 타자 오르한은 터키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에서 숨어사는 동안 역시 오르한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전거를 타고 놀던 15세에 그 화려한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쫓겨나다시피 추방당한 그가 다시 터키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68년이 흐른 뒤였다. 50년이 지난 후부터 계속 탄원서를 냈지만 집권세력은 정치적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추방당한 지 68년이라는, 한 인간의 평생에 해당하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서야 겨우 자기 나라 땅의 흙을 밟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83세. 여론으로 인해 겨우 귀국하게 된 그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그가 바란 것은 단 하나. 어린시절을 보낸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단 5일만 묵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소년 때 떠난 궁전으로 다 늙어서 돌아와 보내는 5일 동안 그는 궁전의 벽을 일일이 손으로 쓰다듬고 다녔다고 한다.
국민들의 계속된 탄원으로 오르한은 마지막 여생을 터키에서 보낼 수도 있었으나 터키에 세금을 한푼도 낸 적이 없는 자신은 터키에 살 자격이 없다면서 다시 이집트로 건너간 후 일년 후에 이집트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즉위식 때처럼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였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독신이었다. 비록 패망한 제국이지만 후세를 남겨 자신처럼 숨어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가 죽을 때까지 혼자 산 이유였다고 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아름답고 화려하게 펼쳐져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보면서 듣게 된 마지막 왕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권력무상을 느끼게 했다.
인간은 왜 그토록 권력을 열망하며 권력의 유무에 집착하는가. 인간은 자유의지를 타고났다고 하는데도 왜 지나고 보면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한가.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의 푸른 물결은 여전히 말이 없다.
신 경 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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