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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라이프 /일요일 혜화동은 "작은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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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라이프 /일요일 혜화동은 "작은 필리핀"

입력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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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를 화창한 하늘이 대신한 14일 오후. 젊음의 거리 '대학로'의 끝자락 혜화동 로터리는 구릿빛 피부의 필리핀 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수 백 명의 필리핀인들은 길가에 늘어 선 트럭에서 음식과 옷가지를 사거나 일주일 만에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부산스럽다. 이들에게 한국어 강좌를 안내하는 자원 봉사자들과 필리핀 음악 CD를 사려는 한국인들과 다른 외국인들도 눈에 띈다.매주 일요일 혜화동 로터리는 '리틀 마닐라'로 옷을 갈아 입는다. 평일에는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식당이 일요일에는 필리핀 레스토랑으로 바뀌거나 주중에 닫혀있던 상점도 이 날은 필리핀 식료품 가게로 문을 연다. 필리핀 은행은 로터리 주변 여행사 사무실에서 필리핀인들의 저축, 송금 등을 위해 하루짜리 출장소를 열기도 한다. 인근 혜화문구의 이종오(36)씨는 "일요일이면 꼭 필리핀에 이민 와서 장사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혜화동 로터리에 필리핀인들의 발길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1998년.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인들은 미사에 참석하고 싶어도 대부분 성당에서 한국어로만 미사가 진행되고 미사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런 필리핀 신자들의 사정을 접한 서울교구가 혜화동 성당에 일요일 오후 1시30분부터 3시까지 필리핀 신부 집전으로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면서 이곳에 필리핀인들이 모여들게 된 것. 의정부에서 왔다는 네야(31·여)씨는 "필리핀 신부님이 필리핀어로 집전하기 때문에 미사를 편안하게 볼 수 있다"며 "친구들과 필리핀 음식 먹으면서 고향 얘기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현재 매주 혜화동 성당을 찾는 필리핀 인들은 1,000여명 정도. 이들 대부분은 서울 근교의 공단 지구에 살고 있지만 멀리 강원도에서 관광버스로 이 곳을 찾는 이들도 있다. 이날은 필리핀대사관 직원이 혜화동 성당으로 파견 나와 내년 있을 필리핀 대통령 선거의 투표자 명단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장(場)이 서는 건 당연지사. 로터리 한 쪽에는 12대의 트럭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늘어서 있다. 각각의 트럭에는 야채와 조미료, 럼피아(롤빵)와 팬시트(우동), 그리고 해산물 등이 가득 실려있다. 트럭 곁에는 국제전화카드를 사고 팔거나 필리핀 현지의 최신가요 CD와 드라마를 녹화한 테이프 판매상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종로구 관계자는 "필리핀 상인들 사이에 자리 싸움이 치열해 금요일 밤부터 트럭을 대놓는 이들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장터는 갖가지 정보의 나눔터자 사교의 공간도 된다. 일자리에 대한 정보부터 고향 소식까지 오가는 정보는 다양하다. 이 날의 화제는 단연 추석 연휴. 고리오(32)씨는 "오랜만에 가진 긴 휴가를 어떻게 보냈는 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며 "평소 가보지 못한 남산타워나 놀이동산을 들렀다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시행 계획을 발표한 고용허가제도 주요 얘깃거리다. 고리오씨는 "필리핀 현지로 돌아갈 경우 일자리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불법체류자 자진 출국 기한이 11월15일로 정해지자 불안해 하는 이들이 많다"며 "대책을 논의하면서 서로 위로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마이클(35)씨는 "공고를 통한 정보보다 여기서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는 취업 정보가 훨씬 풍부하고 정확하다"고 전했다.

혜화동 로터리가 필리핀인들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지만 이를 지켜보는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풍경이다. 박모(26·여)씨는 "일요일 오후엔 로터리 쪽에 가는 게 꺼려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혜화성당 관리인 유요셉씨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장소 제공을 할 뿐 필리핀인들과의 구체적인 교류는 없다"며 "필리핀 신자들도 아직까지는 한국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래서 혜화동 로터리를 한국과 필리핀의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혜화성당의 한 교인은 "잠시나마 타국 생활을 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다양한 행사를 통해 필리핀 사람들과 좀 더 친밀해 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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