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어울려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먹다 선생님에게 들켜 꾸중을 들은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절도가 없다’ ‘불량스럽다’ ‘너희가 땅거지냐’…. 각종 비난과 질책을 받을 공포에도 불구하고 훔치듯 거리에서 사먹는 음식이 어찌나 맛있던지.여름내내 지친 입맛이 무섭게 되살아나는 가을.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어른이 되었어도 맛있는 길거리 음식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역시 힘들다. 떡볶이, 오뎅, 순대 등 고전적 메뉴부터 피자, 일식, 와플, 케밥, 생과일 주스 등 길에서는 쉽게 보기 힘들었던 음식까지 좌판을 장식하고 손길을 뻗친다.
"거리 음식이 아닌 거리 요리"
두달전 서울 종각 앞 사거리에는 초밥집 입구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등이 걸렸다. 일본식 모자를 쓴 종업원이 달궈진 불판에 정성스럽게 반죽을 부어 동그랗게 구어 내는 이 요리의 이름은 ‘문어구이’란 뜻의 ‘다코야끼(たこ燒)’. 앉아 먹을 수 있는 좌석이나 제대로 된 매장도 없지만 6개들이 1인분의 가격은 3,000원. 햄버거 하나 값 정도다.
“문어, 다랑어, 생강, 파 등 들어가는 재료만 10가지가 넘고 모든 원료는 일본에서 직수입한 겁니다. 한번 만들려면 20분 이상 걸리죠. 일본에는 몇 대에 걸쳐 다코야끼만 만드는 장인 집안도 있어요. 이 정도면 단순한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전문 요리라고 하는 편이 맞는 거 아닌가요?” 종로점을 운영하는 김진성(42ㆍ가명)씨의 자존심이 엿보인다.
1년 전 문을 연 이화여대 앞 떡볶이 골목의 핫도그집 ‘빅&블랙’ 주인 우상운씨. 1999년 동덕여대 부근에서 시작해 하루 500개가 팔려나갈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누리다 길거리 음식의 메카인 이화여대로 진출했다. 일반 핫도그와는 달리 카스텔라로 된 빵을 두 겹으로 말아 독특한 설탕 양념을 바른 후 케첩과 겨자소스를 얹어 모양새부터 화려하다. 양념 만드는 법이나 기름이 배지 않게 튀기는 비결 등에 관해 우씨는 ‘영업비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서울 시내에서 핫도그를 사먹을 수 있는 곳은 수천 곳에 달할 겁니다. 아무리 10분이면 다 먹는 핫도그라지만 뭔가 다르게 하니 다른 곳보다 두 배 정도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단골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이제 길거리 음식도 ‘뜨내기’ 손님만 보고 장사할 수는 없거든요.”
월드컵과 M세대가 이끈 거리음식
‘코 묻은 돈’ 100원을 내면 떡 열개와 어묵 두 조각을 세어서 얹어주던 1980년대식 길거리 음식이 독특한 레시피와 맛을 갖춘 정식 요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단순히 아줌마의 손맛에만 의존하던 떡볶이만 해도 위에 다진 야채를 얹은 야채 볶음형, 간장양념에 불고기를 얹은 궁중떡볶이, 치즈를 얹은 퓨전 스타일 등으로 점점 다양화되는 추세. 물론 가격대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기본형 떡볶이의 가격은 보통 1인분에 2,000원선. 88 서울올림픽 때와 비교하면 10배 이상 뛰었다.
냉보리차나 냉커피가 고작이었던 길거리 음료도 테이크아웃 커피의 등장을 계기로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더운 날 학교 앞 ‘구루마’를 점령하던 300원짜리 콘 아이스크림은 어느덧 값비싼 카페에서나 볼 수 있던 생과일 주스에게 자리를 내줬다. 여대 앞에는 한잔에 3,000원에 달하는 버블티를 만들어 파는 카트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소위 트렌디하다는 음식과 음료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셈이다.
길거리 음식의 활성화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큰 몫을 했다는 게 대다수 상인들의 분석이다. 1970~80년대로부터 이어져오던 ‘거리=저항’이라는 공식을 ‘거리=즐거움, 젊은 열기’로 확실히 바꿔놓은 것. 거리 응원전에 온 힘을 쏟은 덕분에 허기진 수천만의 남녀노소는 편의점으로, 길거리 노점으로, 손수레로 발길을 향해 길거리 음식 붐을 일으키는데 공헌했다.
이와 더불어 ‘먹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해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M(mobileㆍ이동)세대’들의 빠르고 역동적인 생활방식 역시 길거리 음식의 양성화에 힘을 더했다.
손수레ㆍ포장마차도 체인시대
번화가에서 길거리 음식을 만들어 파는 많은 수레나 소형점포 중에 ‘괜찮다’ 싶은 먹거리 앞에는 종종 전화번호가 하나씩 붙어있다. 체인점 본사 번호다.
단순한 군것질거리에 불과하던 길거리 음식이 고급화되고 다양화하기까지 전문 체인은 큰 역할을 했다. 많은 길거리 점포들은 단순히 요리 솜씨 좋은 아줌마의 소일거리를 넘어서 조리법, 재료조달, 포장 등을 일괄적으로 공급하는 체인 형태로 대형화하고 있다.
‘다코야끼’도 본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대부분의 재료를 공수받고 있으며 중국식 고구마 맛탕인 ‘빠스’를 운영하는 체인 본사만도 다섯 개에 달한다. 길거리 음식의 원조 붕어빵과 호두과자, 호떡은 물론 신종 먹거리인 와플, 케밥, 손바닥 피자, 생과일 주스 매장의 상당수가 본사 중심의 체인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카트에서 생크림 와플과 토스트 등을 판매하는 ‘해피리아’ 방재원 대표는 “1년 전 문을 연 후 점포수가 꾸준히 늘어 지금은 전국 20여개에 달한다”며 “개인 창업비용보다 저렴하고 검증된 조리법으로 맛에 대한 위험부담이 적을 뿐 아니라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일괄적으로 구입, 공급하기 때문에 체인 형태로 운영되는 길거리 음식점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 류호성기자 slowstep@hk.co.kr
/사진 채지은기자 c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