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이고, 솔직히 사과하고 싶다.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1년 전인 지난해 9월17일 평양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는 장면이다. 북한측 실무자가 일본측에 '8명은 숨졌고 5명은 살아있다'는 자료를 넘겨준 직후였다.
일본에서는 이날을 '9·17'이라고 부른다. 첫 북일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새기려는 뜻이 아니다. 납치문제가 일본의 여론과 사람들의 의식에 가져온 충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과거 군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일본의 보통사람들에겐 오랫동안 국가나 민족은 담론의 금기였으며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전후 경제성장을 향유해오면서 그것들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하굣길의 여중생, 데이트 중이던 남녀가 다른 나라에 납치돼 20여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겼다가 사망 또는 생존의 명단으로 돌아오는 '위기'가 사실로 밝혀졌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에 대한 성토와 피랍자 가족의 호소를 외면해온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반성이 이어지며 애국심 동포의식 같은 단어들이 복권됐다. 일본의 '9·17'은 미국의 '9·11'과 흡사한 충격과 변화를 불러온 것이다.
또 일본 보통사람들 사이에 처음으로 피해자의식이 생겨나며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가해자 의식은 좀더 흐릿해지고 있다. 반대로 "납치는 조작"이라고 굳게 믿었던 조총련계를 포함해 재일동포 사회 전반에는 처음으로 가해자의식 비슷한 죄책감이 생겨났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들에게 "징병, 징용, 군대위안부로 수없이 끌고 갔던 것은 어찌 생각하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는 납북자가 더 많다는데 국가나 국민이 왜 가만히 있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신윤석 도쿄특파원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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