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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3> 1원50전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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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3> 1원50전의 행운

입력
2003.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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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김을 맸을까. 어느덧 해가 머리 바로 위쪽까지 와 있었다. 근처 밭에서 함께 김을 매던 다른 집들은 점심을 먹겠다며 하던 일을 멈추고 다들 집으로 향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어설 생각도 않으셨다. 집에 가 봐야 먹을 게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밀기울로 만든 밥이나 죽이 먹거리의 전부였는데 그나마 아침과 저녁때만 먹을 수 있었다. 갑자기 호미를 쥔 손에 힘이 빠지더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극심한 영양실조에서 온 경련이었다. 어머니가 보면 마음아파 하실까 봐 손에 힘을 주고 꽉 잡으려니 떨림이 더 심해져 아예 팔 전체가 후들거렸다. 앞서 김을 매던 어머니가 몸을 돌려 내 몰골을 보고 하얗게 놀라던 얼굴, 그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때가 내 나이 열넷, 보통학교 4학년때였다.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번동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지독한 가난을 달고 살아야 했다. 아버지 원낙범(元洛範)은 술에 찌들어 집안일을 거의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 김승수(金承水) 혼자 살림을 도맡다 보니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하다 열한 살이 돼서야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마 4학년 올라갈 때 폐교되는 바람에 월사금(수업료)이 연간 5원50전인 공립 보통학교(초등학교)로 옮겨야 했는데 집안형편으론 도저히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에서 연간 5원의 장학금을 받게 돼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6학년에 올라가서는 월사금 외에 부수적으로 드는 학비를 댈 길이 없어 또다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궁(窮)하면 통(通)한다 했던가. 그 때까지 도(道)에서 내려온 10원의 장학금을 나를 포함해 두 명이 받고있었는데 내 딱한 사정을 듣고는 학교에서 다른 학생 몫까지 나에게 몰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가 소 두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진작부터 가장의 역할을 하기로 결심한 터라 큰 충격도 아니었다. 장례를 치르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빚쟁이와의 담판이었다. 빚쟁이는 빚을 갚지 못하는 과부의 딸을 빼앗을 정도로 지독한 고리대금업자였다. 내가 다짜고짜 찾아가 "누에를 쳐서 다 갚을 테니 2년만 기다려 달라"고 하자 빚쟁이는 의외로 "옛말에 강가에 논사지 말고 젊은이에게 빚주라 했으니 잘 해서 갚게"라고 순순하게 나왔다. 다소 얼떨떨해 돌아오긴 했지만 사실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솟아날 구멍은 뜻밖의 곳에서 다가왔다. 막막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군청에서 영농자금을 대출받으러 오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무슨 말인가. 대출을 신청한 적도 없는데.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농촌지역 청년들에게 토지구입 등의 영농자금을 대출해 주는 총독부의 '농촌자력갱생운동'의 수혜자로 내가 선정된 것이었다. 대출은 연6%의 이자에 24년 걸쳐 상환하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봄에 한말을 빌리면 가을에 반말의 이자를 덧붙여 줘야하는 장리(長利)쌀이 대출관행이던 점을 감안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사정은 이랬다.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으로 받은 10원 가운데 사용하고 남은 1원50전을 내가 졸업하면서 학교에 돌려준 적이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인 교장은 그 일을 두고두고 조회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군청에 대출 수혜자로 나를 추천해 준 이가 바로 일본인 교장이었던 것이다. 우연히 다가온 행운으로 가난은 그렇게 지나가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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