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2주년을 맞은 지금 세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테러 직전 세계는 탈냉전 10여 년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는 소위 탈이데올로기와 탈군사화를 목표로 한 낙관적인 국제질서의 등장을 기대하도록 하였고 새롭게 등장한 정보기술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 세계는 민주화와 경제적 국제주의를 추진하는 미국의 일방적 리더십에 차츰 익숙해져 가는 상황이었다. 한편 새로운 국제구조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리던 구 군사동맹체제는 공동의 적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9·11 테러는 인간적 참상뿐 아니라 탈냉전 이후 국제질서가 잉태하고 있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총체적으로 불안했던 미국 중심의 유일체제가 오히려 테러로 인해 확고한 세계질서로 자리잡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유일체제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대 테러 전쟁은 공동의 적을 찾는 데는 성공했으나 적을 소멸시키는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인식을 불러왔다. 세계는 테러의 공포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합의를 보았지만 새로운 미래 질서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사적 수단에 의한 공포의 단기적 제거에 열중하는 미국과, 테러가 제기한 보다 근본적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나머지 세계 사이에 간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런 미국과의 인식 차이는 탈냉전 이후 숨겨진 공동의 적(敵)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표면화시켰다. 세계질서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공포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선포한 미국은 비록 이라크전에서는 승리했지만, 미국인들과 세계인들을 안심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미국 주도의 대 테러 전쟁은 국제적 협조를 받지 못하는 미국의 일방주의가 많은 난관과 불안을 야기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또한 지난 2년간 세계는 9·11 테러가 제기한 문제들을 냉정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왜 테러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9·11 테러는 경제적 세계통합이 정치적 민주화와 평화를 가져온다는 신자유주의의 낙관주의에 제동을 가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세계화가 갈등의 세계화도 동시에 초래할 수 있다는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였다.
또한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누적된 민족주의적 감정, 종교적 갈등, 지역과 국가간 불평등은 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9·11 테러는 분명 세계화와 민주화의 진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동시에 공평성이 확보된 세계화가 아니면 진정한 세계화는 어렵다는 교훈을 깊이 남겼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는 모자이크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전통적인 냉전질서의 유산이 남아 있는가 하면, 테러와의 공동전쟁을 모색해야 하며, 동시에 경제적 세계화를 겪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근본적 가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모자이크식 국제질서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런 복잡한 국제질서의 성격은 국내정치적 갈등과 연계되어 외교정책의 목표설정과 집행과정에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은 당분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중요한 것이 리더십의 역할이다. 역동적인 상황과 갈등하는 목표들 속에서는 일관성 유지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의 처지와 목표를 국민에게 더욱 상세하고 절실하게 설명하는 것만이 난국을 이길 수 있는 지지를 이끌어 내는 길일 것이다.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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