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 영화 중 내 마음을 강렬히 동하게 한 건 겨우 한두 개 상영관(서울 기준)에서 아주 초라(?)하게 선보인, 굿판 위에 펼쳐지는 충격과 감동의 다큐멘터리 '영매'(감독 박기복)다.온갖 영화적·미학적 판단을 유보시킬 뿐 아니라 그 어떤 종교적 장벽마저도 극복하는 데 성공한 '진심'의 기록이다. 그 속에는 우리네 삶을 한번쯤 반추하고, 나아가 우리 주변의 불우한 삶들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끔 하는 힘이 담겨 있다.
'화제 제조기' 김기덕 감독의 아홉 번째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그런 힘이 느껴지는 영화다. 진부하게 비치기도 하는 도식성 등으로 인해 감독의 전작들만큼 강하게 끌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동자승에서 노승에 이르는 인간사를 사계절에 빗댄 것하며 그 인간사를 구성하는 에피소드 등에는 진부하다고 일축할 수만 없을 보편성이 살아 숨쉰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격정적으로 살아온 것 아닌가"라는 '되돌아봄'으로 시작해서일까. 영화 내내 삶에의 어떤 성찰 내지 여백도 뚜렷하다.
여로 모로 김 감독 특유의 그 지독한 잔혹성이 적잖이 순화되었다. 당장 데뷔작 '악어'(1996) 이래 단 한 차례도 거른 적 없었던 그 악명 높은 여성 학대 및 강간 시퀀스부터가 없다. 김 감독의 이 변신은 과연 성숙·화해일까, 아니면 일탈·타협일까.
'28일 후'(사진)도 '트레인스포팅'(1996)의 기린아 대니 보일의 변화가 단연 눈길을 끄는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1997) '비치'(2000) 등 수준 이하의 할리우드 진출작을 거친 후 고국 영국으로 귀환해 인상적으로 빚어낸 SF 호러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1990년대 한때 영국 영화를 부흥시킬 으뜸 주역으로 간주된 스타 감독 보일의 '현대판 묵시록'이자 '대영 제국', 나아가 '현대 문명의 몰락'이다. 플롯이 다소 산만하다는 따위의 불만을 떨칠 수 없으나, 정작 영국에서는 '1970년대 이래 최고의 영국 호러', '켄 로치 스타일의 좀비 영화' 등 호들갑스러운 극찬이 쏟아졌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28일 후'보다 개인적으로 더 끌리는 건 '케이―펙스'(감독 이안 소프틀리)다. 자신을 '케이―펙스'라는 행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 프롯(케빈 스페이시)과 처음엔 그저 담당의사로서 나중엔 친구로서 그 별난 환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가는 마크 파웰(제프 브리지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휴먼 드라마. 출연진의 열연 및 배역 해석이 우선 돋보이나 더욱 인상적인 건 프롯과 파웰뿐만 아니라 프롯과 다른 수감인들 사이에 서서히 형성·발전돼 가는 관계의 전이 과정이다. 인간관계의 소중함은 말할 것 없고, 삶의 섬세함, 변화무쌍함이 강렬히 감지되는 것이다. 뜻밖의 매혹적인 영화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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