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연휴가 끝났다. 3일에서 길게는 9일까지 휴가를 즐긴 사람들이 오늘 아침 일터로 돌아왔다. 모두가 새로운 마음이다.연휴에도 뉴스가 폭주했다. 태풍 매미가 남부지방을 강타하여 100 여명이 희생되고,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는 멕시코의 칸쿤에서 우리 농민대표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사마 빈 라덴의 생존설을 뒷받침하는 녹화 테이프가 나타나고, 9·11 2주년을 맞은 미국은 또 다른 테러를 경계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번 연휴에 대부분의 신문은 사흘동안 휴간했다. 신문이 사흘이나 뉴스를 외면한 것은 독자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문이 안 나와 더 잘 쉴 수 있었다는 독자도 있었다.
신문이 이렇게 '공해' 취급을 받는 것은 신문에도 책임이 있지만, 보다 큰 이유는 국민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기사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가장 불쾌한 기사는 정치기사다. 연휴로 잠잠했던 정치판 싸움이 당장 오늘부터 재개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우선 김두관 행자부 장관의 거취가 문제가 될 것이다. 연휴가 끝나는 대로 김 장관이 사표를 내고, 좀 시간이 지난 후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는데, 그렇게 수습된다면 불행 중 다행이다.
한나라당이 김 장관 해임건의안에 집착한 것은 제1당으로서 바른 처신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처신 역시 옳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추석 전 기자간담회에서 "해임건의안을 호락호락 받지 않겠다. 국정감사는 김 장관이 받아야 한다. 그로 인해 정부가 불편해지고, 국민이 불안을 느끼고, 상당히 어려워지면 그때 가서 결단 내려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기분은 알겠지만 지금 그 문제로 장기전을 펼 여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김철수 교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헌법학자가 국회의 해임건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한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헌법학자들은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각자 노선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보수적인 학자는 보수적인 신문에, 진보적인 학자는 진보적인 신문에 글을 쓰면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전체 여론조사라도 하기 전에는 헌법학자들의 다수 의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헌법을 볼모 삼아 여야가 오래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법적 구속력이든 정치적 구속력이든 대통령이 국회의 해임건의를 거부할 수는 없다.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고 시간을 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은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이 불안해 하기 전에, 정쟁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대통령은 분하고 야속한 일을 수없이 겪는 자리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분하다고 소리지르고, 호락호락 안 넘어가겠다고 버티면 나라가 시끄럽고 대통령의 체통이 구겨진다. 말없이 참아도 국민은 대통령의 마음을 알고 있다. 거대야당의 이런 횡포를 용납하면 장관들이 어떻게 소신껏 일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은 기우다. 한나라당은 이번 일로 이미 상처를 입었다. 정당이 여론을 무시하고 무리한 일을 계속할 수는 없다.
신당 창당을 둘러싼 민주당 내분도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조폭을 무색케 하는 적나라한 폭력사태에 국민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실패한 정치의 원인은 당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비슷한 세력끼리 당을 만들어 새 정치를 펼 생각이라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용히 갈라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싸운다면 양측 모두 공멸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이번 연휴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민심을 읽었을 것이다. 자기편 민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대편 민심이다. 보수는 진보의 의견을 많이 듣고 진보는 보수의 의견을 많이 들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의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끼리끼리 감싸주고 박수치는 것은 패거리 놀음이지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국민의 염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연휴에서 돌아와 새롭게 일손을 잡은 국민들에게 흙탕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상처가 이렇게 깊고, 세계는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어제 하던 추태를 반복할 수는 없다. 한가위 이후, 모두가 심기일전하기 바란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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