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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자전적 영어학습서 펴낸 한국외대 奇人 이 상 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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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자전적 영어학습서 펴낸 한국외대 奇人 이 상 준 교수

입력
2003.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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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영어 학습서가 나왔다. 이름하여 '영어 정복자(The Conqueror of English)'. 책 표지에 '영어의 바이블, 한달 만에 영어 완전정복'이라고 쓰인 걸 보면, 하루가 멀게 쏟아져 나오는 그렇고 그런 영어 학습서의 하나로 치부해버리기 십상.그런데 제목 옆에 또 설명이 붙었다. '이상준 박사의 자전소설' '공부의 꼴찌가 중3 여름방학 한달 만에 영어를 완전히 정복해가는 인간승리의 다큐멘터리' 이건 무슨 소린가. 펼쳐보니 그제야 납득이 간다. 자신의 성장과정을 그린 소설과 영어 학습법을 함께 뭉뚱그려 놓았다. 이 기발한 책은 올 여름 출간되자마자 대형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저자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서 평생 후학을 기르고 칠순이 다된 지금도 여전히 강단에서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 영어학 박사 이상준(李相俊·68) 명예교수다. "(소설을 읽듯)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나처럼 영어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장담도 솔깃했지만, 무엇보다 책에 씌어진 그의 인생역정이 하도 극적이어서 그를 만났다.

사실 이상준이라는 이름은 1970, 80년대 서울서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아주 낯설지 않다. (물론 한국외대에서는 거의 전설이다) 강의 때마다 파격적인 언행으로 늘 화제에 오르는 '괴짜'로, 87년 호헌(護憲) 철폐 서명에 앞장 선 민주교수로, 수 틀리면 학교재단과도 싸움을 불사하는 좌충우돌 정의파로 그의 명성은 일찍이 학교 담을 훌쩍 넘었다.

교수니까 일단 강의 스타일부터가 궁금했다. 제자들의 전언. "중학 1년생도 알아들을 만큼 아주 쉽고 명쾌하게 강의한다. 학문적인 폼을 잡지 않는다." "수업 중에도 온갖 쌍욕이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성적 경험담도 마구 해댄다. 그런데 그게 불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학생들이 조르면 '오 솔레미오' 같은 노래 부르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키보드로 반주까지 해가며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희생된 이라크인들을 추모한다며 목탁을 갖고 와 학생들과 염불도 했다. (그는 최근에 정식안수를 받은 목사이기도 하다)" "가라데와 검법도 시연하고 가르친다.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동료교수들도 거들었다. "그는 세미나, 학회 등의 행사 후 회식 때 늘 가방에서 막걸리를 꺼내 마신다. 한국사람은 한국술을 마셔야 한다나?" "60, 70년대 교수들마다 대입과외로 돈을 벌 때도 그는 '망국병'이라며 하지 않았다. 아들이 고교 때 과외 안 시켜준다고 가출한 적도 있다. (그 아들은 그래도 명문대를 들어갔다)" "그는 돈에 관심이 없다. 지금도 학교 옆 5,000만원 전셋집에 산다. 아내가 한 거액의 교회 헌금 약속을 지켜줘야 한다며 선뜻 집을 판 때문이다."

이 정도면 거의 '기인(奇人)' 수준이다. 교수실에서 만나본 풍모 또한 그랬다. 대충 손가락으로 빗어넘긴 난발에 풀어헤친 셔츠, 연배답지 않은 단단한 몸, 호탕한 웃음소리, 초면에도 전혀 가리지 않는 육두문자…. 방 한구석에 웬 쇠막대가 눈에 띄었다. "아, 이거요? 봉술 연습용이에요. 건설현장에서 주워온 겁니다."

어차피 기이한 영어 학습서가 계기가 된 만큼 그가 영어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사연에 초점을 맞추자. 그는 일제시대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당시로서는 첨단분야이던 독점적 사진기술자여서 군의 돈을 다 끌어모을 정도였단다. 부자집 아들로 노는 일이 관심사의 전부였으니 공부를 잘 할 턱이 없었다. 해방 직후 경쟁률이 고작 1.3대 1이었던 담양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맨 뒤에 매달렸다. (그러고도 돈으로 합격했다는 눈총을 받았다) 그러니 입학해서도 내내 꼴찌였다.

더 기막힌 건 그 뒤. 아버지가 광주서중 2학년 편입시험을 보라고 했다. 그 학교는 당시 호남의 준재들이 모두 모인다는 명문. "아니 아버지, 저더러 거길 시험보라고요?" "시험지에 수험번호와 이름만 써넣으면 돼." (그는 아버지의 금력에 감탄했다고 했다. 난장판 같던 그 때 시대상이야 족히 말할 것도 없으려니) 하지만 서중에서의 생활은 악몽이었다. 공부에 관한한 자부심이 넘치던 급우들이 돈으로 배지를 산 그를 곱게 보아줄 리 만무했다. 아무도 친구로 대하지 않는 것은 물론, 걸핏하면 집단폭행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지독한 왕따 신세였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계기가 찾아왔다. 중3 여름방학 직전 영어시간. 아는 게 없어 그저 공상에 빠져있던 멍한 눈길이 짝의 답안지로 향했던가 보다. "이 X만도 못한 놈아. 공부도 못하는 게 도둑놈 짓거리까지? 더 이상 학교에 똥칠하지 말고 자퇴해!" 선생의 욕설과 매가 난무했다. 그는 "그 순간 오기가 온 몸을 휘몰아치더라"고 했다. '나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 선생과 비웃음만 날린 급우들에게 기필코 복수하리라.' 복수란 급우들, 아니 선생보다도 더 영어를 잘하는 것뿐이었다.

그날로 난생 처음 공부를 위해 무작정 동네학원을 찾았다. (그는 TG영어학원으로 기억한다) 이 곳에서 인생을 바꿔놓는 30대 스승을 만난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영문학부 출신인 그 선생님에게서 방학 단 한달 만에 영어의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그가 천행의 기연(奇緣)을 맺은 이 선생이야말로 강호에 은둔해 있던 영어의 절정고수였다. (그의 스토리는 어쩐지 중국무협소설의 틀을 닮았다. 그러니 유사한 표현들도 양해하길) 그가 TG선생으로부터 철저하게 전수받은 비기는 바로 문법이었다. 8품사에서부터 문장의 5형식을 비롯한 구문론, 수식요소들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필사적인 영문법 수련이 끝난 방학 마지막날, 스승은 분필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네 영어실력에 비견할 학생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나도 너처럼 완벽한 영문을 쓸 수 없다. 늘 겸허하라." (이 장면 또한 청출어람의 제자를 하산시키는 사부의 모습과 방불하지 않은가)

"말은 결국 법칙으로 이뤄진 겁니다. 영어를 안다는 건 영어의 법칙, 즉 영문법을 아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은 저도 모르게 언어의 문법적 구조를 익혀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나라 과거 영어교육의 문제는 영문법 위주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영문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데 있습니다." 회화를 중시하는 최근의 실용영어교육 경향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박사의 주장이다. 교육이론적으로 시비가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이 주장이 옳음을 이후의 성취로 웅변해 보였다.

마침내 방학이 끝난 2학기 첫날. 그는 전혀 다른 학생으로 학교에 출현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돌아온 장고'였다. (실제로 이 대목에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기타 선율이 떠올랐다) "Did you have a good time during the vacation?(방학동안 잘 지냈냐?)" 급우들에게 영어인사로 일격을 가한 그는 바로 그날 영어시간에 손 들고 칠판 앞에 나가(아마 취학 후 처음이었으리라) 장문의 난해한 영어문장을 완벽하게 설명해냈다. 아연 초토화한 교실의 풍경은 구구히 설명해 무엇하랴. 그는 일약 학교의 스타로 떠올랐고, 이후 외대 영어과 수석합격, 졸업을 거쳐 급기야 영어교수까지 됐다. (그는 미국서 공부한 적이 없는 토종 영어학 박사다) '영어 정복자'는 그 때 한달 간의 공부내용과 과정을 딱 그대로 옮긴 것이란다.

영어와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그의 삶은 기막히다. 중학 때 겪은 6·25 전쟁과 지리산 공비토벌전 와중에서 좌·우익이 번갈아 저지른 만행을 숱하게 목격하고, 그 자신도 학살 현장 등에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었다. 이념의 광란 속에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돼 담배 밀매와 구두닦이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여러 권의 시집과 소설, 수필에 담았다. 대개 세상 명리의 부질없음을 일깨우고, 삶 자체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설파한 내용들이다. '영어 정복자'를 읽다보면 거기에 쓰인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이런 철학까지도 함께 배우게 될 지 모를 일이다.(명강으로 꼽히는 그의 강의과목 중 하나가 '영어와 철학'이다)

그는 요즘 한창 '영어 정복자'의 영역(英譯)에 매달려 있다. 일어와 중국어로의 번역은 동료교수가 자청했다.

"왜 뒤늦게 이런 책을 썼냐고요? 거 왜 '영어공부 할 필요 없다'느니, '문장 몇 개만 외우면 다 된다'느니 하는 책들을 보면 화가 나서요. 도대체 기본 틀 없이 무슨 구조물을 세웁니까. 정확하게 기본을 익히는 것이 매사 가장 쉽고 빠른, 또 유일한 길입니다. 나 같은 열등생이 그걸 증명해 보였잖습니까."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거친 세월에 당당히 맞서 살아온 노교수가 요령과 잔재주가 판치는 세상에 대해 그만의 방식으로 얘기하는 삶의 문법이기도 하다는.

한바탕 걸걸한 '강의'를 마친 그는 두툼한 손으로 책을 떠 안겼다. "선생도 이 책을 꼭 공부하시오." 조만간 평가하겠다는 기세였다. 이런, 난데없는 이 숙제를 어떡한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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