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지방자치에 관한 학술적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머슴골' 회원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 모임은 대구 광주 울산 경남 전남 등의 기초자치단체장들이 주요 회원이었는데, 당적은 다양했지만 한결같이 지방자치의 방향과 진로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국의 기초자치단체장들의 세계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지방자치가 조금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밑으로부터 충실한 기초를 다지면 이들이 미래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졌다.이들 중 한명인 김두관 남해군수가 올해 초 노무현 정권 출범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거론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나의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이 너무 빠르게 다가왔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 젊은 지도자들은 바람직한 풀뿌리 지방자치의 정착을 위해 좀더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중앙 정치판에 내몰려 뿌리를 뽑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과 함께 우리 나라의 관료들이나 정치세계의 두터운 서열의식 때문에 과연 그가 장관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는 불과 6개월 만에 노무현 정부와 한나라당이 벌이는 정치투쟁의 핵폭풍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그에 대한 야당의 견제는 '군수출신'이라는 비아냥을 훨씬 넘어서서 '이장출신'이라거나 '촌놈'이라는 인신공격성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의 금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전국 이장들의 동향이나 남해주민의 반응은 이를 짐작하는 지표가 된다. 더구나 그것을 지역구를 선점하고 있는 야당 중진의원과 한때 이미지 관리를 잘한 정치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거대야당 총무가 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정치를 관통하는 무원칙과 다수의 횡포를 절감하는 시민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한총련 기습시위를 막지 못한 책임이라든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본보기라든가 하는 야당의 해임 건의 논리가 얼마나 궁색한 것인가는 양식있는 시민이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거대야당이 김 장관을 표적으로 삼은 진짜 이유가 단지 그에 대한 감정적 분풀이이거나 5∼6공 낡은 정치인들의 사퇴압력 회피수단, 또는 미래의 잠재적 정적 제거가 아니라 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지방분권화와 정부혁신에 대한 우회적 반대인 경우이다. 너무나 당연히 장관의 거취는 그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의 타당성에 기초하여 판단해야 한다.
이번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헌법규정, 즉 국회의 국무위원 '해임건의'에 대한 대통령의 이행의무에 관해서는 궁극적으로 헌법재판소가 판단할 문제이나, 이것은 1987년 개헌 이전의 규정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대통령의 이행의무를 완화시킨 조항인 것은 분명하다. 김 장관 본인은 이것을 '법적 구속력보다는 정치적 무게'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국회의 장관 해임건의안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에 대해서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있는 국정운영을 위해 거대야당의 장관 해임안을 함부로 수용할 수 없다는 논리는 일리가 있는 것이지만, '코리안 드림의 상징으로 키워주겠다'는 발언은 과거의 패거리 정치문화를 연상시키는 경박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너무 흥분하지 말고 보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비록 별로 타당한 주장이 아니더라도 국회의 건의라는 형식을 띤 거대야당의 압박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태풍과 잦은 비로 인해 땅에서 수확할 것도 별로 없는 이번 가을, 국민들은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는 국민의 걱정이나 정치적 도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리당략과 개인의 정치적 영달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들 모두에게 어떤 심판을 내려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무거운 숙제를 안게 되었다.
정 근 식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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