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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8·끝> 미술계 발전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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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8·끝> 미술계 발전을 기원하며

입력
2003.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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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술인들은 고독하다. 순수미술을 하는 전업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외국의 예를 보면 큰 재단의 장학금은 대부분 순수미술계에 주어 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정부에서는 미술진흥기금을 500억원이나 쌓아 놓고도 순수미술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고 돈을 잘 버는 곳에만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미술 수준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내가 미술관을 짓고 나서 놀란 것은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술관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야 우리나라가 문화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매번 하는 얘기이지만 제3공화국 이래 약간 반짝였던 화단의 경기는 IMF 한파 이후 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식어버렸다. 화단의 모든 사람들이 불경기를 한탄하며 아우성을 치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팔리지도 않는 그림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물린다느니 종합소득세를 매긴다느니 하고 있다. 더욱이 예금실명제로 인해 검은 돈이 문화재나 미술품에 몰릴까 봐 경찰들이 화랑 등을 지키고 감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화단에 관심을 가졌던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미술계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또 그 후임 대통령도 좀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미술관 300개를 만든다고 큰소리만 쳐놓고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다. 현 대통령은 어떠한가. 처음에는 각료 후보를 일반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을 때만 해도 이제야 제대로 되는가 기대를 했었는데 코드 맞추기만 하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다.

나는 IMF 한파 후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내가 1957년 프랑스 체류 중에 그린 50호짜리 '한국의 여인들'이 91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0만 달러에 낙찰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 무렵 미국에서 전시기획전문 업체인 창조적사업위원회(Council for Creative Projects)의 조지프 캐롤(Joseph Caroll) 대표 가 나를 찾아왔다. 프랑스 주재 한국문화원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는 그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내 그림을 보고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 미술품에 대해 깊은 관심과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국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자신이 박수근 유작전에서 40여 점이나 되는 그림을 샀고 현재도 20여 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후로도 두 번이나 부인을 동반해 방한했고, 그 때마다 우리 부부를 몇 번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내 전시를 해보자고 제의하였다. 97년 하모니즘 선언 20주년 기념전에 출품된 내 그림을 본 그는 "20세기 후반기 르네상스"라고 극찬하면서 미국 전시를 추진했다.

나는 미국에서 법대를 나와 국제변호사를 하고 있는 막내 아들 용진이를 불러서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런데 한참 계약서를 들여다보던 아들은 "이 계약은 아버지에게 불리하다"고 했다. 그 쪽 요구대로 계약하면 미국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마다 그림을 한 장씩 빼앗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줄 때도 나의 발언권이 없고 1,000호든 2,000호든 그 쪽 마음대로 골라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없던 일로 하자고 계약을 파기했다. 그 후에도 각국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자는 제의가 많았으나 그 비용을 모두 내가 자비로 충당하는 조건이어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조각 같은 것은 필요하면 원작을 복제할 수 있고, 비디오아트도 음반처럼 얼마든지 복사할 수 있다. 원본이 남아 있어 전시회를 하고 작품을 넘겨주어도 언제든 다시 찍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회화는 다르지 않은가.

90년대처럼 화단의 경기가 좋았을 때는 얼마든지 내 힘으로 전시회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화단의 경기가 좋지 않고 스폰서도 없는 우리에게는 정부의 힘을 바랄 수밖에 없는데 그 정부가 정치싸움이나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무슨 희망이 있는가? 나는 이러한 것을 미술 애호가들에게 호소하면서 아무쪼록 우리의 미술이 세계에 알려지고 더욱 발전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문화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나라만이 진정한 부국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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