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시원한 고음의 테너 신영조(60) 한양대 교수가 어느덧 음악인생 40년을 맞아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제자들과 함께 '가곡과 오페라의 대향연'이라는 제목으로 음악회를 연다. 음악회 준비에 한창인 신 교수를 자택에서 만났다.2년 전 뇌경색으로 1년간 활동을 중단했던 그에게 건강상태를 물으니 "말이 약간 어눌해졌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2시간 넘게 상기된 표정으로 음악인생을 되짚어갔다.
"1963년 한양대 성악과에 입학하면서부터 40년이 됐다"며 말문을 연 신 교수는 20여년 전에 촬영한 '지성의 테너 신영조 애창곡집 제1집' CD 표지사진를 내놓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습이 거의 변함이 없다. 성악 외길을 꾸준히 걸었기 때문일까. 음악평론가 이남진씨가 '성격과 음악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직성이 매력'이라며 '대기만성형' 성악가로 평한 모습 그대로였다.
"사후에 사람들에게 옳지 않은 일로 오르내리기는 싫다"며 "좋은 자리에 덥석 앉기 보다는 분수를 알고 살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선비의 이미지를 풍긴다. 병역 신체검사 때 풍치가 있고 시력이 좋지 않아 면제를 받았는데 떳떳이 활동하고 싶어서 현역을 지원한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경상도 선비집안의 후손이다. 5형제 중 장남으로 서울에 유학와 장충고 2학년 때 성악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집안에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독일 유학 후 75년 33세의 나이로 모교 교수에 임용될 때까지 아버지에게 항상 죄스런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신 교수의 경력은 언뜻 보기에 화려하지만 독일 유학시절에야 빛을 발한 '대기만성'형이다. "모두들 저를 바리톤이라고 했어요. 테너를 하려면 고음이 B플랫은 나와야 하는데 당시는 G음 정도였습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노래에 자신이 없어 군대에 입대해 2년 동안 노래를 중단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상병이 된 이후에 노래를 해봤는데 놀랍게도 고음이 나와 자신을 가졌다고 한다.
국비 유학시험에 합격해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서 1년을 보낸 후 국립 뮌헨음대를 비롯해 독일에서 5년을 배웠는데 독일에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업이 끝난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합판 조립을 해 3개월간 7,600마르크를 모으기도 했다.
지금 와서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 독창 오디션에 합격해놓고도 활동을 하지 않고 귀국한 것이다. "그때 만난 친구들이 하나 둘 세계무대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부러웠습니다."
그는 또 사제지간의 정이 사라지고 있는 점도 안타깝다고 했다. "선배인 테너 박인수, 박수길 교수도 40주년 음악회를 마련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신 교수는 원로 성악가인 안형일 서울대 명예교수를 아직도 노래와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한다.
우리 가곡을 위한 콩쿠르를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는 신 교수는 이번 음악회에서 솔로 두 곡을 부를 예정이다. 신 교수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 등 국내외에서 98회의 독창회를 가졌고 많은 오페라와 음악회 등에 출연했다. 한국음악상과 백남학술상 등을 수상했고, 95∼99년 한양대 음대 학장으로 재직했다. (02)2268―2758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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