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자와 찾은 자'의 소설가 김용성이 1998년에 발표한 장편 '이민'은 남미대륙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4반세기에 걸친 고난사를 그리고 있다. 이민자들의 삶은 조정래의 '아리랑'이나 안수길의 '북간도'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이민이라기보다 망국의 유맹(遺氓)이라 해야 마땅하다. 구소련이나 만주지역의 이민은 여러 작품에 등장하지만, 남미이민을 다룬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용성의 '이민'은 5·16 이후 정부가 농업이민을 권장하던 시기에 독재와 가난을 피해서 자발적으로 한국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당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에 이민을 간 사람들 중에는 좌익활동의 전력 때문에 빨갱이로 낙인이 찍힌 사람, 박정희정권의 사채 동결조치로 부도를 맞은 사람, 빈농신세를 면해 보려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용성이 그린 이민자들은 꿈을 이루기 어려웠다. 고난과 실패의 원인은 외부환경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현지인들의 적의를 부르는 한국인들 특유의 배타성 비열함 허영심 등 내부의 문제가 더 컸다. 작품을 통해 부각시키려 한 것도 이민 가서 떵떵거리고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땀 흘려 번 돈을 토착민들과 나누는 사람이었다.
■ 어느 시대든 이민은 불안정한 개인의 삶과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드러내 준다. 상한 삶을 새롭게 해 보려고 신천지를 찾는 심리가 이민의 주 동기가 된다. 이민 100년을 맞은 올해에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이민열풍도 우리나라의 교육과 정치에 대한 환멸과 염증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한국을 탈출하려는 회피적 저항으로 볼 수 있다. 홈 쇼핑의 이민상품이 거듭 대박을 터뜨리고 해외이주박람회가 연일 성황을 이룬 것도 '지금·여기'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문제는 이민희망대열에 한국사회를 아직 다 살아보지 않은 20∼30대가 많아진 점이다.
■ 이 세대의 특성은 개인주의, 삶의 질 추구, 능동적 사회참여, 의식의 세계화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수적(單數的) 인생경로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장래를 지향하는, 이른바 만족지연의 훈련도 부족하다. 그들은 상한 삶을 새롭게 한다기보다 삶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세상을 찾고 있다. 김용성 소설의 메시지는 환멸과 불안으로 삶을 대하는 사람은 이민을 가더라도 장소만 달라질 뿐 헤매임은 여전하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그 말이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임철순 수석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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