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중2 소녀랍니다." "쉰 살엔 제 이름으로 소설 쓰고 싶어요."'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실'에 참석한 동네 아주머니들의 애교 섞인 자기소개가 수줍게 이어지자 강창래(44·인문사회네트워크 리좀 대표) 교장의 강의 계획안이 발표됐다. "문학사 안 합니다. 작가 공부 안 합니다. 작문 기술 역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세요." 바쁜 시간 쪼개고 쪼개 늦깎이 작가의 꿈을 안고 나선 아주머니들 "마음대로 쓰라"는 강사의 폭탄 선언에 황당할 법도 한데 "저요" 하며 이의 제기하기는커녕 9명 수강생 전원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경기 용인시 기흥읍 신갈리의 한 누추한 건물 2층. 10평도 안 되는 강의실엔 작지만 의미 있는 학교가 1일 문을 열었다. 이름은 '느린문화학교(slowschool.co.kr)'. 학교 간판에 달팽이 한 마리가 떡 하니 그려진걸 보고 '느린 재생화면 돌아가듯 살자는 얘긴가' 하고 넘겨짚는 이들에게 강 교장이 학교 설립 취지를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빨리 빨리는 효율성을 강조하며 사람보다 자본에 봉사하는 태도로 환경과 인간성을 파괴해 행복한 삶을 만들지 못합니다. 정교한 손과 창조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들의 움직임은 느릿느릿하며 여유롭습니다. 느린문화학교는 느리지만 올곧게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합니다."
근사한 제안이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빠듯한 21세기 현대인들의 먹먹한 가슴이 쉬 열리지는 않을 터. 하지만 수강생들은 "오늘은 바쁘게 살아도 내일 더 바쁘게 살아야 하는 날들. 잠시 숨 고르고 느린 걸음으로 파란 하늘 한없이 쳐다보고 싶지 않냐"는 꼬임 한마디에 가슴이 녹아 내렸다.
그래서 김대성(38·상업)씨는 "애들과 함께 일기가 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주부들 틈바구니에 끼었고, 주부 노정운(46)씨는 "느리고 작은 문화를 느끼고 싶었다"며 멀리 대전에서 달려왔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경자(59·여)씨의 고백도 있었다. 느린문화학교에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실(매주 월요일)만 있는 건 아니다.
발 마사지(화) 생활법률(수) 한자(목) 연극(수·목) 그림(금) 교실 등 2개월 과정의 다양한 강좌가 매일 '느린 문화'를 보급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각 강좌는 다른 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문화 강좌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기술이나 완성도보다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히며 느리지만 깊이 있는 문화체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또 단순 주입식이 아닌 강사와 수강생의 일대일 나눔, 공개 토론 등으로 꾸려나가기 위해 수강인원도 일단 10∼15명으로 못박았다. 무엇보다 강좌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표현하게 하는 것이 느린문화학교의 교육 철학이다. 그림 교실은 만화 흉내내기, 상상화 그리기, 느린 미술 전시회 등 재료나 주제를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그릴 수 있도록 하고, 연극 교실은 발성 및 감성 훈련, 기본동작에 집중할 계획이다.
강사진도 화려하다. 극단 연극사랑97 김창률 대표(연극), 동양공대 시각디자인과 이창호 교수(그림), 동남보건전문대 사회문화센터 문정호 교수(발 마사지), (주)이우텔레콤 선경오 이사(생활법률), 원광대 동양철학 전공 한수진(여)씨(한자) 등이 참여한다.
모두 용인에 살고 있는 이들은 평소 '느림의 미학'을 지향하다 의기투합해 각자 전공 분야 한 강좌씩을 맡기로 하고 사비를 털어 사무실까지 빌려 학교를 세웠다. 강 교장은 "2개월 과정이 끝나면 동호회 형태로 문화학습과 문화활동 등의 모임을 이어갈 생각이지만 욕심 내지 않고 차근차근 지역 주민들과 함께 느림의 문화를 생활 속에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교재비 2만원 외의 수강료는 무료. 수강문의 (031)287-8595
/용인=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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