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에 지쳐있던 1997년 여름, 나는 태국 푸켓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공항에서 류시화의 인도여행기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을 샀다.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있는 류시화의 시에 이미 매료돼 있었던 터라, 그 책을 뽑아 드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숙소에 도착, 휴가의 여유를 막 느끼기도 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창 밖 바로 앞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그 뒤로 푸른 골프장과 산이 그림엽서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방안의 등불을 하나씩 켜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장등, 다음엔 벽등, 이렇게 불을 켜나가자 책을 다 읽었을 때는 호텔 방안의 모든 등이 다 켜져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나 자신을 진실로 얻는 일은 나 자신을 완벽하게 버려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창 밖엔 홀로 서 있는 초췌한 모습의 나와 방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의 그 아름다운 풍경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잠자리에 들기 위해 호텔 방의 등불을 하나씩 끄기 시작하니 밖의 풍경이 어둠 속에서 신기하게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TV까지 껐을 땐 창에 담겨 있던 조금 전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골프장과 산, 나무가 선명하게 보였다. 단지 불을 끔으로 해서 나는 그 아름다운 경치를 방안으로 다시 끌어들인 것이다.
순간 책의 내용이 오버랩되며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책의 주제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방 안의 모든 것이 버려진 뒤에야 그 아름다운 밖의 경치를 되찾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당시 사업(건축개발업)상 일본거래처와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나의 휴식만을 위해 그곳에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푸켓에서의 남겨진 일정을 뒤로 하고 공항으로 급히 차를 달렸다.
그리고 밤 12시가 지난 시각에야 일본에 도착, 일을 순조롭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일본인 사업가가 거래를 흔쾌히 승락한 것도 휴가를 취소하고 찾아간 나의 모습에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은 인생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버려야 얻는다.' 이는 생각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에서 나온다. 남의 이해를 얻으려면 먼저 남을 이해해야 하고, 마음의 풍요를 얻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욕심을 하나 하나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푸켓에서의 그 날 밤, 그냥 잠들 뻔 했던 나를 일깨워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그 기막힌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일까?
신 도 진 (주)H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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