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나를 묻어 버렸다. 이 어둡고 축축한 지층 속에. 하여, 하루 하루 화석이 되어가는 시간 감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느날 우연히 내 삶을 방문한 천사를 불러들이는 것.' 백화점 지하에 갇힌 '사나이'는 자신의 일생을 끊임없이 그리고 처절하게 토해 놓는다.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을 모티브로 한 황지우씨의 '물질적 남자'는 원조 교제하는 소녀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갔다가 사고를 당하게 된 한 남자의 내면적 방황과 실존을 다룬 작품으로 지난달 29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빼어난 희곡 작품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제대로 연극화 했는가?'가 이날 공연의 초점이었다. 극의 도입부 백화점 붕괴 현장을 소리로 생생하게 재현한, 비명과 폭음이 뒤섞인 효과음은 무대에 삼층으로 쌓은 스피커와 객석에 설치된 슈퍼 우퍼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를 이미 망각하고 '너무 대책 없이 잘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남자가 갇힌 지하 세계와 그 밖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일상과의 단절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를 이중 구조로 만들고 부부의 침대와 식탁은 무대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배치한 것 등은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를 이미지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또 사나이 역의 남우성은 또렷하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시적 대사를 잘 소화해 냈다. 8년 간 지하에 묻혀 있는 남자의 육신을 형상화한 인형의 움직임도 부드러웠다. 소녀와 질탕하게 놀아났던 바닷가 한 모텔에서의 기억, 그런 자신을 향해 '당신 무덤의 부장품'에 불과하다며 울부 짖던 아내의 모습. 추억과 회한을 게워놓은 사내가 죽음이라는 근원적 문제에 다가가면서 극은 끝을 맺는다. '바람의 옷, 한 벌 남겨두고 잘 가라, 찬란한 여름이여, 슬픈 저녁 음악이여, 너는 울고 있구나! 이 세상에, 혼자서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란 사내의 마지막 독백이 존재의 쓸쓸함을 경험한 모든 사람의 가슴을 때린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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