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만화사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더러 있다. 그 중에서도 만화에서 인기를 끈 주인공 캐릭터의 자식 대(代)까지 등장,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진기록도 제법 있다.1924년 한국화가 심산 노수현(1899∼1978)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멍텅구리'는 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등 당대의 인기를 끌었다. 노 선생은 1935년 '소년중앙'잡지에 '똘똘이'라는 소년만화를 연재한 바 있는데, 이 똘똘이가 바로 '멍텅구리'의 아들이었다. 또 1960년대에는 추동성(고우영의 필명)의 '짱구박사'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 만화에는 짱구박사의 아들 '짱짱이'가 등장해 아버지에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부문의 최고 기록은 누가 뭐라 해도 '심술가족'이 차지한다. 1959년에 처음 발표된 이정문(62)의 '심술첨지'는 지금까지 무려 '심술직계 자손 5대'가 등장했고 이들 모두가 현역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정문의 심술마을 입향조(入鄕祖)는 5대 조부 '심술참봉'이다. 아래턱이 유난히 큰 이 어른의 취미는 똥누는 놈 주저앉히기, 호박에 말뚝 박기, 우는 애 뺨 때리기…. 하는 짓이 정통 심술 놀부 어른을 쏙 닮았다. 참봉어른의 아들이 '심술첨지'로 1960,70년대 인기 정상의 만화 캐릭터로 군림했던 분이다. 당시 '아리랑'을 비롯한 성인 월간잡지에서는 만화 심술첨지가 감초처럼 연재됐다.
심술첨지의 아랫대는 현대판 '심술부부'로, 70년대 후반부터 각종 여성월간지 등의 연재만화로 맹활약을 했다. 이 심술부부는 80년대 이후 다양한 직계와 방계 인척으로 분화되었는데 '심술통' '심술여사' '미스 심술' '미스터 심술' 등의 캐릭터가 그것이다. 심술가계의 적통을 이어받은 4대 손은 '심통이' '심똘이' '심쑥이' '심뽀양' '심토리' 등이다. 이들도 각종 어린이 신문과 월간잡지 등에 연재돼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심술가계의 맨 아랫대(5대)는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심술 개(犬)'. 심술가족에 어울리는 모양새로 개마저도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런저런 매체에 게재된 심술 캐릭터는 무려 20여 가지에 달한다. 심지어는 '심술로봇 뚜까' (1990년)까지 등장한 바 있다.
이정문의 심술로 점철된 일련의 캐릭터 개발은 우리 대중만화사에서 하나의 창작 전범을 제시한,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된다. 40여 년에 이르는 시간 '일관 캐릭터'를 창조해낸 작가적 역량은 후배 만화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그는 "내 만화 속에서의 심술은, 무조건 남을 해롭게 하는 심술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그 속에 우리 민족 고유의 역사와 해학을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 만화가의 한 분인 그는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무골호인으로 만화 속의 그 질깃질깃한 심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난 뒤 곧바로 부모님을 따라 귀국, 중학교 때부터 기성 만화가의 문하생 생활을 거쳐 1959년 데뷔했으며 '알파칸'(1960년) '홍길동'(1962년) 등의 인기 어린이만화도 발표한 바 있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