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만약 기당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합니다."이수성(李壽成·66) 전 국무총리에게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1917∼95) 선생은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깨우쳐준 은사이다. 이 전 총리는 '글자 하나도 삐뚤어지게 쓰지 않는' 기당을 배우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다. 이 전 총리는 "기당 선생님을 흠모하다 보니 그 분이 지낸 서울대 법대 학장, 국무총리 자리까지 뒤따라 간 것 같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전 총리는 5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면서 이 대학 교수이던 기당과 처음 대면했다. 이 전 총리는 이미 기당을 알고 있던 터였다. 이 전 총리의 부친(이충영·李忠榮)과 기당이 일본 동경제대 법학부 선후배 사이였던 것. 이충영씨는 일제 치하에 판사로 재직하다가 창씨개명을 거부해 법복을 벗었고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대쪽 같은 성품과 엄격한 강의로 경외의 대상이던 기당에게 직접 말을 건넨 것은 입학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교수님, 저의 아버님 존함이 충자, 영자입니다." "아, 그래, 이충영 선배에게 속아 광복 전 서울 종로 뒷골목에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고기를 노루고기로 알고 먹었지. 허허." 기당은 이후 이수성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이 전 총리는 대학이 시위로 얼룩지던 80년대 초 서울대 학생처장 시절 학생들을 가능한 제적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도 실은 기당 선생에게 배운 것이다. 69년 7월 '서울대 법대생 경찰 구타사건'이 터졌다. 서울대 법대생들이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잠복 근무 중이던 경찰을 구타하자 경찰이 주동자 처벌을 요구하며 교내 진입을 통보한 것. 당시 기당은 법대 학장이었고 이 전 총리는 총장 비서실장이었다. 기당은 흥분한 농성 학생들 앞에 나서 "경찰이 학교에 들어오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나하고 같이 붙들려 가자"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평소 근엄하기 그지없던 기당의 눈물을 본 학생들은 마음이 흔들렸다. 마라톤 협상 끝에 기당은 타협점을 찾았고 경찰은 철수했다.
사태가 수습되고 나서 학생 처벌이 논의될 때 기당은 "학생에게 제적은 사형이다. 누구나 실수하지 않느냐. 사형은 인간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아예 뺏는 것"이라며 반대해 관철시켰다. 기당의 이 같은 행동은 이 전 총리가 학생처장으로 지내는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 총리는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신한국당 고문 등 큰 자리를 두루 거치면서 원칙과 소신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조금만 타협하면 눈 앞의 커다란 이익을 거머쥘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당 선생님이라면 과연 위선적이거나 권력욕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짓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깨끗하게 단념했습니다."
기당이 87년 5공 말기에 국무총리를 지내다가 6월 항쟁의 와중에서 중도 하차한 것을 놓고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전 총리는 이에 대해 "기당은 법이 흔들리는 현실을 보면서 학자로서 소명의식을 느꼈을 것"이라며 "그분의 현실 참여는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기당이 사망하기 며칠 전인 95년 1월 초 이 전 총리는 서울대 법대 동료들과 함께 기당과 식사를 했다. 제자들이 "기당당(黨)을 만들어서 국가를 바로 세우자"고 제의하자 기당은 온화한 미소로만 일관했다. 그것이 그분과의 마지막 자리가 될 줄이야…. 기당은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현에서 요양 중 심장마비로 78세에 타계했다. 이 전 총리는 서울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했고 관을 직접 맸다. 이 전 총리는 해마다 전남 담양에 있는 기당 묘소를 찾고 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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