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장하고 달랑 빨간 볼펜 하나만 있어도 출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어느 존경받는 원로 출판인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겨우 큰 맘 먹은 몽매한 자의 용기를 북돋우느라 그리 하셨으리라. 그분 말씀처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리 큰 자본 없이 시작할 수도 있는 게 이 업이겠지만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파고들수록 많은 장애요소는 있게 마련이다.우리 출판에서 과학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논문이 아닌 일반 단행본 저술에 대해 눈 흘기는 강단의 풍토도 그러했고, 그저 과학을 전문가들만의 영역에 가두는 일반인들의 선입견도 한몫을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중적인 과학 필자의 확보는 우리 과학 출판의 당면 과제였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작년에 타계한 스티븐 제이 굴드는 어쩌면 수입이라도 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었던 인물 중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저자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거의 매년 굵직한 주제의 책들을 쏟아내면서 과학 대중화에 기여해왔다. 과학과 사회에 대한 성찰로 가득한 그의 글은 과학이론, 역사, 철학, 사회, 문화를 모두 아우른다. 그가 쓴 저서와 에세이들은 동물학, 지질학, 유전학, 생태와 환경,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비롯한 과학학,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주제들을 두루 관통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허구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이를 위해 아이큐, 우생학 속에 들어있는 인종 계급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의 역사적 뿌리를 드러낸다. 굴드의 꼼꼼한 분석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업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장을 교묘하게 변형시킨 숱한 이론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론을 낳는 사회적 토대에 대한 성찰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과학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으며 어느 한쪽에 대한 성찰이 아닌 양자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만 온전한 사회상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직 우리말로 소개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책은 몇 권 더 있지만 그의 글은 이제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혹 그가 지금 그대로인 지식의 용량과 저술의 열정으로 다시 몸을 받는다면 이 땅에서 태어나도록 초대하고 싶다.
/이갑수·궁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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