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기 글·한상언 그림 창작과비평사 발행·8,000원요즘 사람들은 저녁이면 TV를 보지만,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은 모여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17세기 무렵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직업적인 이야기꾼도 등장했다.
이야기꾼들은 직접 지어내거나 기록된 재료를 갖고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곤 했는데, 어찌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잘 하는지 몹시 얄미운 인물이 나오는 대목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착각을 일으켜 이야기꾼을 쳐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와 소설의 중간쯤 되는데, 그 내용을 한문으로 적어놓은 것이 한문 단편이다.
창작과비평사의 '재미있다! 우리 고전' 시리즈 여섯 번째 책으로 나온 '북경 거지'는 양반부터 서민까지 두루 즐기던 그 이야기 중 9편을 골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읽기 좋게 글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
표제작 '북경 거지'는 조선시대 중국에 사절을 보낼 때 따라가던 역관(통역관) 김기운이 나라의 체면을 세우고 부자가 되는 이야기다. 역관들은 중국 물건을 들여와 되팔면 큰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주인공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좋아해 역관이면서도 가난했다.
북경에서 만난 거지가 그에게 돈을 빌려주면 몇 배로 벌어 갚아주겠다고 말한다. 거지가 "조선은 작은 나라여서 사람들 배포가 작다" 면서 자존심을 건드리자 그는 나라에서 빌린 돈 오천 냥을 덥석 내준다. 남들이 바보짓이라고 했지만, 거지는 약속을 지켰다.
이 이야기는 사람 사이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조선 후기 무역 상황이나 중인계급으로 부를 쌓아가던 역관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이야기들도 재미있고 교훈적인 줄거리에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하도 공부를 못해 집에서 쫓겨난 양반이 슬기로운 부인을 만나 과거에 급제하는 내용의 '바보 신랑 성공기'는 과거에 붙어야만 출세길이 열리던 그 시절 사회구조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넌지시 일러준다.
벼슬을 얻으려고 뇌물을 바치느라 전 재산을 날린 양반이 젊은 시절 도와준 불쌍한 여인의 보은으로 늘그막에 부자가 된다는 '엽전 두 꿰미' , 가난한 양반집 하인으로 있다가 돈을 벌어 양반 계급을 산 '옛 하인 막동이' 는 매관매직이 판치고 신분제도가 흔들리던 당시 사회의 거울처럼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요술 바가지를 얻어 부자가 되지만 도깨비들의 당부대로 3년 뒤 바가지를 강에 버린 거지('금 가득 은 가득 요술 바가지')나, 밭을 갈다 은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발견하지만 난데없는 횡재로 벼락부자가 되면 자식들 교육에 오히려 나쁠 것이라고 생각해 자식들이 다 큰 다음에야 파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현명한 어머니('은 항아리') 이야기는 '인생 역전'을 꿈꾸는 요즘 세태를 꾸짖는 듯 하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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